
집 정리를 하던 중 책장 맨 위에서 종이 두루마리를 발견하고 펼쳐보니 추사의‘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不二禪蘭)’의 영인본이었다. 아마 15년 전 충남 예산의 추사 고택을 방문했을 때 관리소 사무실에서 구입한 것으로 기억난다. 당시에 내 어쭙잖은 한자 실력과 고문의 청맹과니가 고매한 주련의 뜻을 어찌 쉽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만, 당시 고택을 둘러보던 중 주련 글귀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세상에서 제일가는 좋은 반찬은 두부와 오이, 생강과 나물이며 세상에서 제일가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들의 모임이라)
이렇게 말한 심정을 협서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斗)만 한 큰 황금 도장을 차고 밥상 앞에 시중드는 여인이 수백 명 있다고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참으로 세상을 초탈한 듯한 내용이며 오욕과 칠정에서 벗어나 그 무엇에서도 부러움의 대상을 찾지 아니하는 빈 마음의 정서가 표백된 글이 아닌가 싶다.
추사의 집안은 4대 때부터 서산에 터를 잡고 한다리, 지금의 대교리 살았다. 신라시대 성씨인 경주김씨이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씨’는 진나라 말기에 ‘성’과 ‘씨’를 합쳐서 부르는 것이다. ‘성’은 모계 혈통이고 ‘씨’는 부계 혈통이다. 예를 들어 논어에 나오는 맹손씨는 부계 혈통임을 알 수 있다.
추사는 아버지인 김노경이 부사로 갈 때 자제군관 자격으로 따라가는 데 추사에게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그때 나이 든 청나라 대 유학자 옹방강을 만난다. 탁본과 경학, 금석학으로 유명한 그가 새벽 4시에 추사를 오라고 한다. 당시 말로는 소통이 불가하기에 필담을 나누는데 옹방강이 추사의 재능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제자로 인정하며 그는 8만 권의 장서를 보여줬다고 한다.
그 당시 경학자로 유명한 완원을 만났는데 그도 놀란다. 옹방강과 완원 그리고 그들 제자들이 전별연을 열어주었고 그것을 화가가 그린다. 한나라 때는 훈고학, 송나라 때는 성리학 그리고 청나라 때는 송나라 글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다시 한나라로 올라가 새롭게 원전을 해석하는 고증학이 발달했는데 이때 추사의 학문은 완원에게서 글씨는 옹방강의 영향을 받는다.
추사는 100여 개가 넘는 호를 사용했다. 그의 호 ‘완당(阮堂)’은 사서삼경에 능한 담계 완원을 좋아해서, 그리고 자신의 서재에 소동파를 보배로 여긴다는 뜻을 담아 보소재(寶蘇齋)란 편액을 걸었다.
그 후 또 한 번 청나라를 가게되었는 데 윤상도 사건으로 아버지 김노경이 삭탈관직 당해서 못 가게 된다. 이 사건에 연루된 추사는 1840년(55세)에 제주도로 위리안치의 형벌을 받고 귀양 간다. 그곳 제주에서 글씨가 많이 변하는 데 바로 추사체이다. 이 무렵에 13번 중국을 다녀온 역관 출신 우선 이상적이 많은 책을 구해서 가져다준다.
언뜻 보면 손 가는 대로 쓴 것 같지만, 장인적인 수련과 피나는 노력 끝에 완성된 추사체이다. 추사가 훗날 친구인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 “70평생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높은 식견과 고품격의 인품에서 서권기와 문자향을 추사에게서 느낀다.
이상적은 스승 완당이 9년여의 제주 귀양살이하는 동안 정성을 다해 중국에서 책들을 구해줌으로써 완당이 <세한도>를 그려 그의 따뜻한 정에 답하면서 ‘세한도 우선 시상 완당(歲寒圖 藕船 是賞 阮堂)’을 써서 작품의 오른쪽 위에 적었고 왼쪽에는 제작 동기와 작품의 의미를 담은 발문을 적었다. 그림을 감상하라면서 자신을 잊지 않고 책을 보내준 제자에게 국보 180호(세한도>를 그려준 것이다. 비록 시대적 배경인 신분의 차이를 떠나 진정 이들은 지음지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2002년 봄, 서울 견지동의 동산방 화랑에서 ‘완당과 완당바람-추사 김정희와 그의 친구들’이라는 기획전이 열렸다. 19세기 동아시아, 조선 후기 최대의 학자이며 명필가로 이름난 추사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시 한번 추사에 대해 아는 만큼의 되새김을 하며 책갈피를 넘겨 보았던 그와 관련된 책들을 뒤적여 본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