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리아헤럴드에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코리아타임즈로 직장을 옮겼다. 정의를 실현할 것 같은 신문기자라는 직업은 나에게 매혹적이지 않았다. 사실을 캐서 진실을 쓰는 일이 권력이 된다는 사실도 불편했다. 뉴스 리포터보다 뉴스메이커가 되는 일이 더 매혹적이고 창조적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가지 않아 코리아타임즈에도 사직서를 던지고 나는 즐거운 공동체 놀이터를 개장했다. 해심, 나의 즐거운 공동체 놀이터다. 화신백화점 뒤 복지다방 자리에 해심을 열었다. 해심을 열기 위해선 자금이 필요했다. 나는 코리아타임즈에 같이 근무했던 선배에게 자금을 부탁했다. 선배는 두말없이 큰 자금을 대줬다. 나는 자신 있게 일 년 안에 두 배로 갚겠노라는 공언했다.
즐겁게 신나게 행복하게 해심 공동체에서 누구나 바다의 마음이 되어 보자는 취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지성과 놀이의 혼연일체를 꿈꾸는 문화유목민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돈이 없는 자, 돈이 많은 자, 가난한 자, 권태로운 자, 근엄한 자, 희망을 잃은 자, 희망이 넘치는 자, 사랑을 얻은 자, 사랑을 잃은 자, 혁명을 꿈꾸는 자, 혁명을 포기한 자, 예술에 미친 자, 예술을 증오한 자, 괴로움에 죽고 싶은 자, 행복해 죽겠는 자들이 모여 밤새 토론하고 밤새 술 마시고 밤새워 놀았다.
“인생을 위해 건배”
“사랑을 위해 건배”
“우리들의 유토피아를 위해 건배”
낭만 취객들의 흥은 그대로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문학이 되었다. 인생 나그네들은 김삿갓처럼 몰려왔다가 김삿갓처럼 몰려갔다. 종로 한복판에서 우리들의 청춘은 불처럼 번지는 민주화를 욕망했고 불처럼 번지는 예술을 욕망했다. 빌어먹을 세상을 한탄했고 이루지 못한 이상세계를 꿈꿨다.
“우리는 역사를 새롭게 쓰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낡은 것은 도려내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실천하지 않는 지성은 죽은 지성이다.”
해심에 온 술꾼들은 창조와 저항으로 무장하고 세상을 바꿀 지성의 무기를 만들며 술이라는 매개체에 의지해 어지러운 시절을 건너고 있었다.
“저항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병신 머저리야”
“그렇지, 좋은 세상은 그냥 오지 않는 법이니까”
“일어서지 않으면 퇴행한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낮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우리들은 괴테를 불러오고 니체를 불러왔다. 노자를 까고 공자를 비웃었다. 예수를 안주 삼고 석가를 조롱했다. 소크라테스를 엿 먹이고 원효를 흉내 냈다.
“이백도 나한테는 질 거야. 난 열두 말도 더 마실 수 있어”
“햐, 이 선생 이백과 겨누면 이기겠는데 하하하”
누구 하나 질세라 천 년 전 이천 년 전 사람들을 불러와 술 자랑하며 시시덕거렸다. 해심이 떠나가고 종로가 떠나가고 대한민국이 떠나가도록 토론하고 술을 마셔댔다.
“이백만 취하냐 나도 취한다.”
“이백만 시선이냐 나도 시선이다”
세상살이 큰 꿈과 같아
어찌 그 삶을 피곤하게 살까.
이것이 종일토록 취하게 하는 까닭이네
홀연히 앞 기둥에 누웠다가
깨어나 뜰 앞을 곁눈질해 보니
한 마리 새가 꽃 사이에서 운다.
지금이 어느 때냐고 물어보니
봄바람이 나는 새와 이야기한다.
이에 감탄하여 탄식하려는데
술을 보니 다시 또 술을 기울이네.
호탕이 노래 부르며 밝은 달 기다리니
곡은 끝나고 그 마음 이미 잊어버린다.
“이백이 박 시인으로 환생한 거 아니오? 하하하”
“아이쿠 무슨 말씀을…….”
“박 시인 이 시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우리처럼 봄날에 취했다가 깨어서 적은 시입니다”
박 시인은 덜 취한 목소리였다. 박 시인이 시낭송을 하자 여기저기서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다. 하나둘 모여들며 시를 하나 더 낭송하라고 압박했다.
“난 백석의 시를 듣고 싶소.”
“난 고대 영문과 교수입니다. 오늘은 백석이 왈칵 그리워지는 밤입니다.”
“백석은 해금이 되지 않았지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는 남에서도 북에서도 잊히고 있지요. 천재 시인을 우리라도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지요.”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누군가는 술잔을 놓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는 술을 마셨고 누군가는 흐르는 눈물을 소리 없이 닦았다. 백석을 불러온 낭송을 끝낸 박 시인의 입에서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덧난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것 같은 슬픔이 해심 안의 공기를 무겁게 눌려대고 있었다. 어디 백석뿐이랴. 남과 북으로 갈린 고통은 상실과 망각의 침묵이었다. 마차 누구도 건들 수 없는 침묵을 꺼내 우리는 고립무원을 열고 있었다.
“이거 공기가 너무 무겁군요. 이번엔 제가 백석의 시를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하하하 지금은 기자를 하고 있지만 제가 이래 봬도 신춘문예 출신입니다.”
정수리가 훤히 보이는 후배 기자가 패기 있게 일어나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유쾌한 목소리를 지닌 후배 기자는 금방 좌중을 휘어잡고 낭송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조곤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사랑을 하려면 백석처럼 해야지”
“아, 백석이 부럽다”
“백석의 첫사랑은 란일까요. 애제자 고순덕일까요. 아니면 기생 자야일까요?”
“이 세상 모든 여인들이 아닐까 하하하”
밤은 깊어가고 세월은 더 깊어가는 해심에서 취생몽생하며 한마디씩 던졌다. 취하면 솔직해 지고 취하면 인생이 보인다. 취하면 권태로운 세상을 비틀어 보고 취하면 체게바라가 된다. 취하면 대통령도 되고 취하면 노숙자도 된다. 취한 밤은 사랑하기 알맞고 취한 밤은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누구나 해심에서 철학 문학했다. 주인도 취하고 객도 취하는 해심에서 밤이면 밤마다 생을 찬미했고 생을 비판했다. 장안의 골통들은 다 모여들었다. 장안의 천재들도 다 모여들었다. 빨갱이도 모여들었고 파랭이도 모여들었다. 반골도 모여들었고 선민도 모여들었다.
해심공동체는 바다다. 바다의 심장이다. 나는 해심주를 만들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대접했다. 찹쌀에 귤과 생강을 넣어 만든 막걸리에 꿀을 타고 솔잎을 띄운 해심주는 담론과 토론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거기다가 해산물을 넣어 만든 해심탕을 안주로 내놓으면 날이 새는 줄 모르고 토론하고 마시고 놀았다. 불철주야 주야장천 연일연야 하면서 안티 예수를 외친 니체처럼 밤이면 밤마다 파계하며 심오한 담론을 펼쳤다.
“김 교수 자네가 철학과 교수니까 물어보는데 망치 든 그놈 말이야 정신병자였다지?”
“에이 씹할, 이 세상 정신병자 아닌 놈이 어디 있어. 안 그래 강 작가?”
“하하하, 철학가다운 대답일세.”
“나도 니체처럼 극심한 편두통에 시달리고 있다네. 니체나 나나 인생이 좆같지”
꼬부라지는 혀로 새는 말들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김 교수는 앞에 있는 강 작가에게 시비를 걸었다. 눈이 풀린 강 작가는 술잔을 잡아 입에 대려다가 떨어트렸다. 떨어트린 왕소라 술잔이 댕굴댕굴 굴러가다가 앞에 있는 김 교수 발아래 멈췄다. 이미 취한 김 교수는 발밑에 있는 왕소라 술잔을 발로 차려다가 헛발질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긴 지 여기저기서 힐끗거리며 웃었다. 김 교수는 풀린 눈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놀란 토끼처럼 눈을 비비더니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김 교수를 잡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은 그의 변함없는 술버릇이었다. 친구들은 그의 술버릇이 부인 탓이라며 씁쓸해했다. 친구들은 김 교수의 부인이 악명 높은 소크라테스의 부인 같은 여자라고 안타까워했다.
“어이, 천재 이리로 와, 같이 이 밤이 새도록 같이 마셔보세”
“천재 자네도 나도 만성자살특공대지”
“강 작가님 저는 빼주세요. 하하하”
“허허, 우린 술로 대동단결한 만성자살특공대로 살자. 인생 뭐 있나. 안 그래?”
“태상아, 너도 이리와 같이 마시자”
천재 선배는 서울대 국문과 선배였다. 종교학과 출신인 내게 영어 번역을 부탁해서 여러 번 변역해 주었었다. 문학가로서도 이름을 날리고 젊은 나이에 신문사 논설위원이 된 그는 천재라는 별명이 붙었다. 끝없는 지적 호기심으로 모두를 놀라게 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자네 사상계에서도 일했었지?”
“네 부완혁 발행인의 요청을 받고 무보수 게릴라 편집장 일했습니다.”
“자네야말로 천재지. 그러니까 부완혁 선생이 그 어려운 편집장 일을 맡겼겠지”
“과한 칭찬입니다. 선배님”
“장준하 선생님이 사상계를 창간해서 후에 부완혁 선생님이 이어받았지?”
“네 맞습니다. 동서고금의 사상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잡지지요”
“나도 기억한다네. 창간할 당시 돈이 없으니까 장준하 선생님과 사모님이 자료 수집부터 원고를 직접 쓰시고 편집하시고 배송까지 잡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하셨다고 하는데 언론계에서는 신화지…….”
“육이오 전쟁이 끝나자 지성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이 사상계를 구매하기 시작해서 만 부를 넘어서게 되었지요.”
“그래, 그랬지 그 무렵에 사상계에서 동인문학상도 만들었지”
“선배님도 신문사로 가지 않으셨다면 사상계에서 큰일을 하셨을 겁니다.”
“이승만 정권이 사상계를 눈엣가시로 여겼지, 함석헌 선생님이 기고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을 문제 삼아서 발행인인 장준하 선생님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안기부가 연행해 갔지”
“그 일을 계기로 자유언론투쟁에 앞장선 장준하 선생님이 막사이사이상을 탔지요.”
“술이나 먹자. 도박은 본전 생각날 때가 고비다. 인생도 그렇지”
밤은 깊어 가는데 강 작가는 노래를 부르겠다며 일어섰다. 옆에 앉은 천재 선배는 일어선 강 작가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Love me tender, love me sweet
Never let me go
You have made my life complete
And I love you so
Love me tender, love me true
All my dreams fulfill
For my darlin' I love you
And I always will
Love me tender, love me long
Take me to your heart
For it's there that I belong
And we'll never part
Love me tender, love me true
All my dreams fulfill
For my darlin' I love you
And I always will
Love me tender, love me dear
Tell me you are mine
I'll be yours through all the years
Till the the end of time
Love me tender, love me true
All my dreams fulfill
For my darlin' I love
우락부락한 외모와는 달리 잔잔한 강물처럼 부드러운 강 작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귀를 세우고 노래를 들었다. 목을 넘어오는 소리는 취한 듯 취하지 않은 듯 매혹적인 음색으로 부르는 노래에 다들 심취했다.
“와우, 강 작가님 브라보”
“선배님, 작가보다 가수 하면 성공하겠어요.”
다들 한마디씩 했다. 담론 끝에 노래가 있고 노래 끝에 철학이 있고 철학 끝에 우정이 있고 우정과 우정 사이에 지성의 가치가 있었다.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도 있고 자신만을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해심은 울타리를 치지 않았다. 누구나 오고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자유를 담보로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해심공동체에서 누구나 하나가 되곤 했다. 하나는 사랑의 다른 말이다. 나는 신문기자를 그만두길 잘했다. 해심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알았고 사회와 사회를 알았다. 세상과 세상을 알았고 바다의 마음을 얻었다. 일 년 만에 해심공동체는 장안의 큰 이슈가 되었고 덕분에 흑자를 낼 수 있었다. 나를 믿고 자금을 대준 코리아타임즈 선배 기자님께 원금을 두 배로 갚고 이자까지 넉넉하게 드렸다.
“역시 난 기자의 촉이 있단 말이야. 자네라면 성공할 줄 알았지 하하하”
“선배님 덕분입니다. 선배님이 자금을 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지요.”
“선배 후배 다 불러서 한잔하세”
나는 선배 후배뿐만 아니라 아는 지인들을 모두 불러서 술잔이 넘치도록 돌리고 또 돌렸다. 인생이 가고 세월이 가고 시간이 가도록 우리들의 담론은 끝날 줄 몰랐다. 술이 있고 우정이 있고 좋은 사람들이 있는 해심공동체에서 우리들은 시대의 불운을 토로하고 시대의 낭만에 취해 날이 새는 줄 몰랐다.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대로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대로 그대로 붙여 두게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장에서 매매하는 것은 시세대로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안 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살리라
누군가 김삿갓의 시를 나직나직하게 읊었다. 잔잔하게 울리는 김삿갓의 시 낭송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벌겋게 충혈된 눈을 비비며 이 밤이 한량없이 떠돌던 조선의 불행한 시인을 만나고 있었다.
내 삿갓은
정처 없는 빈 배
한 번 쓰고 보니
평생 함께 떠도네.
목동이 걸치고
송아지 몰며
어부는 그저
갈매기와 노닐지만
취하면 걸어두고
꽃구경
흥이 나면 벗어들고
달구경
속인들의 의관은
겉치레, 체면치레
비가 오나 바람 부나
내사 아무 걱정 없네.
선배 기자가 벌떡 일어나 답례로 김삿갓의 ‘나와 삿갓’을 낭송했다. 부르주아처럼 생긴 뚱뚱한 몸과는 달리 선배 기자의 음색은 미소년처럼 고왔다. 선배 기자의 시낭송에 다를 술이 확 깨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 우리도 비가 오나 바람 부나 걱정 접어두고 술이나 마시자”
“김삿갓처럼 우리도 겉치레 체면치레 다 버립시다. 브라보”
요란하고 거창한 간판 없이도 해심이라는 소박한 공동체에 모인 지성인들은 김삿갓처럼 시대의 불운을 토로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몰아냈던 행동하는 양심들이 해심공동체를 이끌어가며 박정희 독재정권의 몰락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내 편 아니면 모두 죽일 원수가 아니라 가슴속에 숨어 있는 내 마음의 폭군부터 몰아내는 정신운동을 위해 해심공동체로 모여들었다. 해심공동체는 내 청춘의 신나는 놀이터였으며 정신적 빈곤에 시달리던 영혼들이 쉬어가는 정거장이었다. 우리의 인생은 해심공동체에서 상투성으로 빛났고 거지처럼 가난했으며 소년들처럼 유치찬란했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도덕이나 순결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찌릿한 청춘을 즐기며 사회의 권력 독재에 항거했다. 해심은 내게 청춘의 선물이었다.
“우린 기껏해야 백 년짜리 인생의 부품일 뿐이야. 백년 안에 답을 찾지 못하면 억겁을 줘도 못 찾지…….”
선배 기자의 의미심장한 말은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았다. 몇 년간 즐거웠던 해심공동체를 두고 나는 서울을 떠나 영국으로 갔다. 가면서 백년부품으로 억겁의 답을 찾기 위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넓히며 새로운 세계로 나갔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