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아랑가] 암행어사 Mr.박

박춘석 작사 / 작곡 장군멍군 절창

암행어사가 그리운 시절이다. 난세를 헤쳐 나갈 중용의 깃발을 든 영웅(英雄)이 절실하고, 강국행민(强國幸民)을 주창하는 지조 고결한 호걸(豪傑) 기다림으로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하다. 왜 이리 소인배 졸뱅이들이 넘치는가. 이제는 이런 졸뱅이들을 향하여 비웃음을 던지는 소(牛)도 눈을 돌려버리는 세상이 되어 가니 어찌하면 좋으랴.

 

우리(we = you + me)라는 말은 어디로 가고, 끼리로 뭉친 짝패(one's mate = me + me)들만 풍컬거리는가. 도(道)도 없고 선(善)도 없고 편(偏)만 끼룩거리면서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는 세상이 왔다.

 

이런 시절에 그리운 이(관직)가 암행어사이다. 역참(驛站)에서 언제라도 새 말(馬)을 갈아타고, 쉰 비린내가 푸럭거리는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을 향하여 달려갈 수 있는 표식, 마패(馬牌)를 허리춤에 찬 선량(善良)과 한량(閑良)을 아우른 도랑(道朗)이라 부를만한 암행어사.

 

이런 도랑은 세속 사에도 사랑 사(史)에도 또록하다. 우리 역사 속에서 사랑하는 여인 춘향이를 변 사또로부터 구해낸 호걸 암행어사는 이 도령이고, 환난 속에 허적거리는 백성들을 구해낸 인물은 어사 박문수다.

 

그는 임금의 명을 받고 특별한 임무를 수행한 어사(御史)를 여러 번 역임하였지만, 암행어사에는 단 한 번도 임명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조선 백성들은 박문수를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인식했었고, 그의 암행어사 행적은 바람결을 타고 들불처럼 번져서 제주도에서 함경도까지 풍설을 일으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런 유명세를 탄 박문수가 유행가의 주인공으로 환생한 것은 당연한 귀결, 그 대표적인 노래가 1988년 박춘석이 노랫말과 가락을 얽어서 장군멍군이 세상에 내놓은 <암행어사 Mr. 박>이다.

 

억울해서 우는 사람 보살피고 달래는 호걸~.

 

발길이 닿는 대로 동서라 남북 / 조랑말에 마패 하나 벗을 삼아 / 어딘들 못 가리 / 억울해서 우는 사람 / 달래고 보살피는 사나이 / 효자 열녀 찾아다니며 / 한양 천 리 임금님께 포상을 내리도록 / 인정 많은 정의의 사나이 / 암행어사 미스타 박

 

해 저문 산마루에 갈 길은 멀어 / 주막집에 발을 멈춰 한잔 술에 / 시름을 달래며 / 동네방네 뜬소문을 들으며 / 찾아가는 사나이 / 착한 사람 잘 사는 세상 / 팔도강산 방방곡곡 태평세월 누리도록 / 눈물 많은 의리의 사나이 / 암행어사 미스타 박.

 

평민 복장에 죽장을 들고 괴나리봇짐을 맨 거사가 눈에 어른거린다. 행색은 남루(襤褸)했지만 눈매는 매섭고, 귀 문은 활짝 열렸었다. 따끈한 가슴팍에 인정도 많다.

 

그의 발길을 끄는 이정표는 동네방네 뜬소문이다. 착한 사람 사는 세상, 방방곡곡 태평세월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그의 소명(calling profession by God)이고 사명(mission)이다.

 

2024년 대한민국 하 수상한 시절에 안성맞춤인 민정 시찰관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분은 단 하나도 없고, 한 쪽 눈·한 쪽 귀만 벌렁거리는 졸뱅이들만 득실거리니 어이할꼬. 이제는 이런 치졸들의 까발랑거림에 눈 총알도 쏘기도 아깝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눈물 많은 의리의 사나이, 이순신 장군을 닮은 영웅과 그를 도운 31세 연상의 조방장(참모장) 정걸(1514~1597) 같은 호걸은 언제쯤 오시려나.

 

어사 박문수는 1691년(숙종 17) 평택시 진위면 외가에서 출생하여, 1751(영조 32)에 타계한 조선의 명 선비, 호걸이었다. 그는 9세경 아버지(박항한)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굶더라도 머리를 채워 아는 힘을 길러야 한다.’

 

어사 박문수 어머니의 교훈이다.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초계변씨와 닮았다. 어사 박문수는 이순신 장군보다 146년 후예 문신이다. 그는 33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그가 급제한 시문은 ‘낙조(落照)’다.

 

‘지는 해 푸른 산에 걸려 / 붉은 해를 토하고 / 찬 하늘에 까마귀가 /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 나루를 묻는 길손 / 채찍질 급하고 / 절 찾아가는 스님의 / 지팡이도 바쁘다 / 뒷동산 풀어놓은 소 / 그림자 길기만 하고 / 망부대 위로 아낙네 쪽(머리) / 그림자 나지막 하다 / 오래되어 예스런 고목들이 / 줄지어 선 남쪽 냇길에 / 짧은 머리 초동이 / 피리 불며 돌아온다.’

 

그는 소론계로 1723년 문과에 급제하지만, 이듬해 노론계 집권으로 삭직(파직) 당한다. 하지만 3년 뒤 정미환국(1727년, 영조 3년. 당파중심을 깬 정부 개편)으로 복직되어 영남안집어사로 임명된다.

 

이듬해 영남도 관찰사와 뒤이어 영남 감진어사를 지내고, 1737년 병조판서에 이어, 청나라 사신(동지사) 파견, 함경도 관찰사, 어영대장(영조 임금 경호실장),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그 시절 박문수는 영조 임금의 편애를 받은 선비다. 정치적으로도 상대방을 적대 논리로 대하지 않은 영조의 탕평책과도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영조는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이며,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잠잘 때 외에는 언제나 경을 생각한다.’고 했단다.

 

그는 영조가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할 때 명문벌열(名門閥閱) 중심의 인사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했으며, 4색(四色, 남인·북인·노론·소론)의 고른 인재 등용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인식되었고, 훗날 그의 행적이 유행가의 주인공으로, 영화·드라마의 주인공으로 환생을 했던 것이다.

 

2024년 대한민국의 암행어사 박문수는 어디에 있는가.

 

박문수는 1727년(영조 3) 9월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史)로 영남(문경새재 이남 지망, 현재 경상도)에 파견되었다. 암행어사는 아니었다. 다음 해 3월까지 안동·예천·상주 등지를 순행하며, 지역에 명망 있는 인사들과 공개적인 만남을 가졌고, 이때 나라 양식 배분, 고위 관료 급여 삭감, 백성 구제 등등의 행적을 남긴다.

 

박문수가 영남으로 갈 때, 잠시 쉬어갔다는 소나무(박문수 소나무)가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 있고, 그가 문경새재 제3관문을 통과하면서 마패를 잠시 걸어두었다고 하는 마패봉(마역봉)이 있다. 충주·괴산과 문경이 연결되는 해발고도 940m의 고개다.

 

우리나라 암행어사는, 조선 명종(1534~1567) 이후 350여 년간 600여 명이 임명되었다. 김정희·채제공·정약용·조광조·이황 등이 암행어사를 역임한 호걸들이었다.

 

암행어사(暗行御史)는 임금 직속의 임시관리, 비밀리에 파견하여 비밀감찰 임무를 수행하였다. 암행어사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명종 5년인 1555년이다. 암행어사는 당하관(3급이하) 관리 중 왕이 추생(抽牲, 임의로 추첨)하여 임명했지만, 당상관(고위공무원)을 암행어사로 임명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 제도는 1892년(고종 29) 전라도 암행어사인 이면상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암행어사는 봉서(封書, 밀봉된 문서)와 사목(事目, 임무목록), 마패(馬牌, 역마를 갈아탈 수 있는 패)와 유척(鍮尺, 놋쇠로 만든 자)을 받았다. 이 물품들은 한 개의 상자에 담긴 채로 왕이 비밀리에 직접 주거나 관리를 통해 사택으로 직접 전달하였고, 선발된 암행어사는 봉서를 받는 즉시 출발하였다.

 

밀봉된 표지에는 도남대문외개탁(到南大門外開坼, 남대문 밖에 도달하면 열어볼 것). 또는 도동대문외개탁(到東大門外開坼, 동대문 밖에 도달하면 열어볼 것)이라고 써서 내용은 한성 밖에서만 열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암행어사는 품계 분류상 관찰사(도지사)와 대등한 권한을 가졌다. 마패(馬牌)는 조선 상서원(尙書院)에서 발행한 둥근 동판, 관리들이 공무로 지방 출장을 갈 때 역(驛)에서 말을 징빙할 수 있는 증빙 수단이었다.

 

<암행어사 Mr. 박>을 지은 한국대중가요계의 악성(樂聖), 박춘석은 2010년 81세로 별세했다. 평생을 홀로 지낸 총각의 타계였다.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6년간 긴 투병 생활의 마감이었다.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조선고무공업주식회사를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본명은 의병(義秉), 춘석은 아명이다. 봉래소학교, 경기중을 거치면서 피아노·아코디언을 독파했다.

 

1949년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에 입학하지만 이듬해 신흥대학(경희대) 영문과로 편입해 졸업했다. 경기중 4학년(고교1년) 때 길옥윤의 제의로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 서면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한 그는 1954년 가수 백일희가 부른 <황혼의 엘레지>를 시작으로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대중가요 2,700여 곡을 작곡했다. 그가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짝사랑은 김혜자(패티김), 그가 조탁(彫琢, 보석을 갈고 조각하여서 보물로 만듦)한 엘레지의 여왕은 이미자다.

 

한국대중가요 100년사에 <암행어사 Mr. 박> 같은 노래는 많다. 1950년대 신라송의 <암행어사 박문수>(김문응 사, 이재호 곡)를 필두로 <암행어사 이도령>(백년설), <나그네>(안다성, 영화 암행어사 주제가), <암행어사>(하춘화·봉봉), <암행어사 박문수>(어린이 만화영화 주제곡), 암행어사(김상범) 등.

 

2020년 11월 평택시 진위면에 <암행어사 박문수문화관>이 개관되었다. 박문수가 태어난 곳, 외가가 진위면 봉남리다. 이곳에서 그는 5세경까지 성장했단다. 어사 박문수의 영혼을 다시 불러 세울 요량으로 지은 곳이리라.

 

2024년 대한민국의 암행어사 박문수는 어디에 계시는가, 어제나 오시려나. 두 쪼가리로 갈라진 백성들의 영혼 없이 일그러진 몰골이 보이는가. 그들을 정치권력의 수단으로 편용(偏用)하는 졸뱅이들을 언제라야 응징 하리야~.

 

저 졸뱅이들을 향한 코스미안 명궁·신궁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들을 향한 글 화살을 정조준하는 이 새벽, 허꺼무레 밝아 오는 창틀 너머로 암행어사를 태운 말발굽 소리가 구렁구렁 들려온다.

 

 

[유차영]

한국아랑가연구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글로벌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경기대학교 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교수

이메일 : 519444@hanmail.net

 

작성 2024.11.19 10:47 수정 2024.11.1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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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