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가 나를 불렀다. 수줍은 처녀처럼 내게 어서 오라고 속삭였다. 영국으로 가는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나는 미국출판사 프렌티스 홀의 한국 대표로 일하게 되었는데 워낙 열심히 일하다 보니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출판사 일이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영어와 영문에 자신 있는 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재미를 느꼈다. 어떤 일이든 내게 주어진 일에는 책임감을 갖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성격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열정적으로 일했다. 나는 나그네 정신을 버리고 주인 정신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일했다.
“태상, 자네는 일에 대한 열정은 대단해, 이런 프로는 본 적이 없다네.”
프렌티스 홀의 미국 대표는 한국 대표인 내 능력을 인정하고 무한 신뢰했다. 그즈음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결혼했다. 신부는 개성 출신으로 이대를 나온 아가씨였다. 행복한 결혼 생활은 아니었지만, 선택에 대한 책임감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여쁜 세 딸을 얻었고 세 딸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행복했다.
프렌티스 홀 미국 대표는 나에게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나는 미국 대표의 권유에 따라 호주로 전근 오퍼를 받았다. 그런데 호주정부에서는 비유럽계 사람들에게는 영주 비자를 주지 않는 바람에 호주 대신 영국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유럽대륙 서북쪽 대서양에 있는 입헌왕국인 섬나라 영국으로 가는 기회를 잡았지만 남의 나라에 가서 일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힘없는 동양의 작은 나라의 국민이 겪어야 할 수많은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의 지표를 세우고 일기장에 써 내려갔다.
여행을 잘하려면 짐이 가벼워야 한다.
인생여행도 마찬가지로 짐을 가볍게 하리라.
나는 아무렇게나 굴러도 우뚝 서는 오뚝이
머리를 가볍게 정신을 가볍게 마음을 가볍게 하리라.
나는 자유인이 되리라 자유의지로 세상을 살아보리라.
살아있음의 환희를 맛보는 진정한 여행을 하리라
삶 자체가 여행이고 모험이며 탐험이다.
망설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하루하루 순간순간 용감무쌍하게 살아보리라
세상에 아무리 꽃과 별이 많아도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것만큼 뿐이고
세상에 아무리 소리가 많다고 해도
내가 들을 수 있는 것밖에 없다.
그 밖에는 있어도 없는 것이다.
꽃을 보는 눈은 꽃이 되고
별을 보는 눈은 별이 된다.
음악을 듣는 귀는 음악이 된다.
사랑하는 만큼 가슴이 뛰고
뛰는 가슴만큼 사랑하게 된다.
나는 가슴 뛰는 대로 살아보리라
아내는 이것저것 짐을 잔뜩 꾸렸다. 다 가져갈 수도 없는 짐을 욕심껏 꾸리느라 며칠 밤을 새웠다. 나는 아내를 말렸지만, 고집이 센 아내는 말을 듣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제도만 없었다면 매사에 사사건건 부딪치는 아내와 남이 되어도 열두 번은 더 되었을 것이다. 개성상인의 후예인 아내는 욕심이 많은 데다가 남에게 베풀 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큰 기업가인 장인어른도 딸인 내 아내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 정도였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와 다를 바 없는 아내 때문에 나는 친구들에게 외면당하기도 했다. 나는 노랭이 아내 길들이기에 실패하고 이혼도 실패했다. 겨우 뜯어말려 짐을 반으로 줄이고 서울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 한국은 곧 유신체제가 될 거라는 친구의 귀띔이 있었지만 나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발령 난 직장을 따라 영국 런던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영국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고 험했다. 세 살짜리 큰 애는 걷고, 돌이 지난 지 육 개월이 된 둘째 아이는 아내가 등에 업고, 태어난 지 석 달 된 막내는 내가 안고 김포공항으로 갔다. 서울에서 영국 런던까지 꼬박 한 달이 걸렸다. 한 달 동안 열여덟 번이나 비행기를 타고 내렸다. 처음엔 김포공항에서 동경으로 갔다. 동경에서 며칠을 묶고 다시 홍콩으로 갔다. 자유도시 홍콩에서 필요한 책을 좀 사고 여행의 피로를 풀면서 며칠을 묵었다. 그리고 태국 방콕으로 갔다.
천사의 도시 방콕에서 소승불교를 좀 더 알고 싶었다. 대대로 불교에 귀의한 태국 국왕들은 사원을 짓고 경전을 펴내면서 불교를 바탕으로 국민을 통치했다. 태국에 태어난 남자는 성인이 되기 전에 꼭 한 번은 승적에 들어가 불교사원에서 수행자 체험을 하는 것이 전통이다. 민주주의 국가인 태국에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전 국민 대다수가 불교를 신앙하고 있다. 종교학을 공부한 나는 그들의 신앙의 근원도 궁금했지만, 그들이 믿는 소승불교를 종교학적 관점에서 학문해보고 싶었다. 짧은 시간에 다 공부할 수는 없었지만, 방콕에는 꼭 와보고 싶었다. 방콕에서 불교사원을 둘러보며 며칠을 보내고 이탈리아 로마로 갔다.
로마는 아내가 좋아하는 도시였다. 아내는 로마에서 로마의 휴일처럼 며칠을 보냈다. 오드리 헵번처럼 일탈을 꿈꾸며 사랑에 대한 로망을 키웠는지 모른다. 오드리 헵번이 걸었던 길을 걸으며 아내는 행복해했다. 우리는 영화처럼 로마의 휴일에 그리스 아테네로 떠났다. 신들의 고향 그리스 아테네는 오랫동안 와보고 싶었던 도시였다. 인간이 만들어 낸 신들의 고향을 돌아보며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떠났다. 암스테르담을 둘러보고 파리를 거쳐 드디어 런던에 도착했다.
1972년 2월 14일 영국에 도착해서 하트포드셔 킹스랭리 동네에 있는 집으로 입주했다. 작은 이층집에서 영국 생활을 시작했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직장 생활은 쉽지 않았다. 대영제국의 콧대 높은 영국인들은 신사적이면서 정중했지만, 그 이면에는 심한 인종차별이 있었다. 보이지 않게 음성적으로 자행되는 갖은 냉대와 차별 대우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네까짓 것들 암만 그래봐라 내가 눈 하나 깜박거리나…….”
유일한 동양인은 나 혼자뿐인 프렌티스 홀 영국 지사 출판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저들의 냉대와 멸시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는 길이다. 나는 그들에게 위대한 한국인의 능력을 보여 주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영국에 인재가 없어서 미개한 한국에서 사람을 데려왔어?”
영국 지사장은 나를 대놓고 무시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비웃으며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자행하는 무시와 멸시는 견딜 수 있었지만, 한국인을 무시하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힘없는 작은 나라, 일제 식민지를 겪자마자 전쟁을 또 겪은 나라의 설움이라는 것은 피눈물 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내게 시련을 주면 줄수록 나는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항상 당당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에 매진했다.
“당신들의 그 콧대를 꺾어 주고 말겠어.”
나는 과다한 업무도 마다하지 않고 일했다. 저들에게 짓밟히고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초인적으로 일했다.
“당신 그렇게 일하다가 쓰러지겠어요.”
아내는 걱정했지만 나는 출판사 일하면서도 런던대학원 철학과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입학통지서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일도 일이지만 공부하지 않으면 이 사회에서 도태될 것 같았다. 나는 출판사 업무를 위해 영국 전역을 이 잡듯이 누비며 다녔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를 포함한 대브리톤 전역을 돌며 각 대학을 순방했다. 프렌티스 홀 산하 50여 개의 출판사에서 매년 수천 권의 신간이 발행된다. 그 가운데 신간 서적을 대학마다 과목별로 교재로 채택시키기 위해 불철주야 뛰고 또 뛰었다. 영국 전역을 돌며 연평균 200회 이상 이동 도서 전시회를 열었다.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도서 추천과 구매신청이 밀물들이 쏟아졌다. 나는 각 대학 도서관에 교재와 책들을 납품하는 것 말고도 각종 학술대회와 학회에 참석해서 학계 동향을 파악하고 새 교재 집필자를 물색하는 등 미친 듯이 일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전에 영국 지사에 근무하는 십여 명의 직원들이 해오던 일을 나 혼자 도맡게 되었다. 하지만 판매실적은 십여 명의 영국 직원들이 할 때보다 나 혼자 일한 실적이 세 배가 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각 대학의 교수들과 도서관 사서들과 친분도 쌓게 되고 메일링 리스트를 철저하고 완벽하게 작성해 놓을 수 있었다.
“이태상 씨 당신의 능력을 몰라봐서 미안합니다. 전에 내가 했던 말을 사과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의 동료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동료들은 자신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일하는 나를 인정하고 능력껏 열심히 일한 것에 찬사를 보내며 코리아라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 대한 편견도 조금씩 씻어내고 있었다. 직장 생활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만들 수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영국에서의 생활은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사람들을 사귀고 서로 소통하면서 어디에 사나 어느 누구를 만나나 사람들은 다 욕심과 양심을 갖고 있는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잘하면 상대방도 잘하고 내가 양심적이면 상대방도 양심적으로 된다.
사는 일이 다 그런 것인가 보다. 그렇게 영국에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정착을 해 나갈 즈음 싱가포르에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영국 지사장은 나를 추천했다. 나는 싱가포르로 전근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전근조건이 너무 열악하고 부당했다. 외국인으로서 당연히 받게 되어있는 주택비, 자녀교육비, 기타 수당의 혜택이 하나도 없었다.
싱가포르 사람들은 싼 정부 아파트에 살면서 학비가 들지 않는 중국어를 사용하는 공립학교에 애들을 보내지만 나 같은 경우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제학교에 애들을 보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내 월급으로는 턱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 학비는 고사하고 먹고사는 일도 버겁게 된다. 이는 같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현지인인 싱가포르 사람과 같은 대우밖에 못 해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 부당한 일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부당한 차별을 하는 것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나는 싱가포르로 가는 전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회사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번 싱가포르로 가는 전근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회사가 결정한 사항입니다. 받아들이세요.”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혜택을 주십시오.”
“외국인주제에 받을 건 다 받겠다는 거요?”
“부당한 인사는 참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회사는 나에게 감원을 이유로 해고했다. 해고하고 나서 한국에서 근무한 연수는 제외하고 영국에서 근무한 기간에 그것도 일 년에 일주일 분의 급료를 계산해 퇴직금을 주었다. 이 적은 돈을 퇴직금이라고 주면서 우리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표와 이사비용조차 주지 않았다.
“당신은 영국 지사로 전근하면서 새로 고용계약서를 쓰지 않지 않았소?”
“그게 이유입니까? 고용계약서를 새로 써야 한다고 당신들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 책임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이대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는 회사의 말도 안 되는 횡포이며 작은 나라 국민을 업신여기는 처사였다. 한 인간에 대한 도전이며 대영제국의 실수였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리라 마음먹었다.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이 진짜 잘못이다. 내가 그 잘못을 바로잡겠다고 마음먹었다. 회사를 상대로 싸울 전투를 준비했다. 분하고 억울한 심정을 반듯이 바로 잡아 나 같은 약소국가의 설움을 누군가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으로 법정투쟁을 시작했다. 나는 런던 중심가에 있는 유명한 변호사를 찾아갔다.
“회사는 도의적인 책임은 있을지언정 법적인 책임은 없습니다. 회사는 영국의 현행법에 따라 퇴직금까지 주었습니다.”
영리하게 생긴 변호사는 논리정연하게 나를 설득했다. 나는 다른 변호사를 또 찾아갔다.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했다. 십여 명의 변호사를 찾아가 의논했지만 모두 이구동성으로 법에 호소해봤자 뾰족한 수가 없다는 대답만 했다. 영국 국민들에게는 도의적인 책임이란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더구나 돌아갈 비용마저 주지 않는 영국인들의 도덕적 불감증을 단호하게 고쳐보리라 마음먹었다. 나는 영국언론에 편지를 써서 호소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국 전역에 있는 언론에 편지를 띄워 호소했는데 뜻밖에 런던타임즈와 가디언에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던 하크포드셔 킹스랭리 지역신문인 이브닝 포스트 에코에서도 연락이 왔다. 중앙신문에서 내 억울하고 딱한 사연을 기사로 크게 내주어서 영국 사회에 이슈가 되었다. 지역신문에서도 지역민들의 소수인 동양인계의 억울한 사연을 보도해 주었지만, 영국사회와 프렌티스 홀 영국 지사는 배 째라는 식으로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미개인 취급을 하며 나를 조롱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내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사는 지역구 출신인 노동당 국회의원인 브라이언 세지모어를 찾아갔다.
“영국은 인권을 중요시하는 나라 아닙니까. 외국인인 나를 이렇게 부려 먹고 부당해고하는 것은 대영제국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지요.”
“이태상 씨의 억울한 사정을 잘 압니다.”
“저는 대영제국의 국회를 믿겠습니다. 제 억울한 사연을 꼭 해결해 주십시오.”
“제가 영국국회에서 당신의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만 믿겠습니다.”
브라이언 세지모어는 국회에 내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프렌티스 홀 영국지사 대표를 만났다. 하지만 프렌티스 홀 영국지사 대표는 코웃음을 치며 오히려 브라이언 세지모어와 나를 비웃었다. 가장 민주적인 나라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일이 자행되고 있었다. 나는 이 기나긴 싸움을 시작했지만,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인권이 살아있다는 영국에서 나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들이 외치는 정의가 살아있다면 그 살아있는 정의를 통해 내가 영국까지 왔던 이유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더스트리얼 트라이뷰널이라는 노사분쟁 중재재판소에 이 문제를 제소했다. 그러자 프렌티스 홀 영국 지사는 미국 변호사 두 명과 영국 변호사 두 명, 총 네 명의 변호사를 사서 프렌티스 홀 영국 지사 측의 변호를 맡겼다. 나는 변호사를 살 돈도 없었지만 영국 변호사 누구도 나의 변호를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백퍼센트 지는 싸움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나를 변호하겠다.”
나는 영국법정에 서서 내가 나를 변호했다. 프렌티스 홀 영국 지사가 선임한 화려한 네 명의 변호사와 맞서 나는 당당하게 영국인들의 외국인에게 자행되는 부당한 노동법과 인권을 변호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리한 법정 싸움은 때론 통쾌했고 때론 고통스러웠다. 일 년여를 두고 끌어온 재판이 드디어 판결의 순간을 맞았다.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한 재판관 한 사람, 노동자를 대표하는 재판관 한 사람, 사용자를 대표하는 재판관 한 사람 이렇게 세 사람의 의견을 모아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영국법원의 상례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이 싸움에서 나는 집념과 오기로 일관했다. 약자를 얕보는 것을 그대로 둔다면 이는 나뿐만 아니라 또 다른 약자가 당할 수 있는 문제다. 외국인이라서 차별받는다면 그건 민주주의 꽃인 영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 만장일치로 이태상 씨가 승소했습니다.”
법정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재판장은 물론 고용주 편에 서야 할 판사까지도 나의 편을 들어 주었다. 심지어 회사 측 변호인들로부터 찬사와 축하까지 받았다. 이 승리는 나의 승리가 아니라 힘없는 나라의 모든 국민들의 승리였다.
“이태상 씨, 당신의 집념이 만든 이 승리는 우리 모두의 승리입니다. 축하합니다.”
얼마 되지 않는 우리 교포들뿐만 아니라 영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이 재판을 관심 있게 지켜본 영국의 언론사들은 연일 지면을 할애해서 대서특필했다.
다윗소년과 골리앗의 대결이다.
대영제국과 코리아의 대결로
작은 코리아가 대영제국을 이겼다.
영국언론은 코리아라는 나라에 대한 특집까지 실으며 이 사건을 처음부터 정리해가며 크게 떠들어댔다. 나는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이 긴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관성은 반작용을 이긴다. 반작용을 이용하는 집단은 관성을 이길 수 없다. 관계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했던 프렌티스 홀 영국지사는 힘없는 타인에 대해 저질렀던 악행이라는 반작용을 반성했을 것이다. 암묵적으로 합의된 집단의 시스템을 건드린 나는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연 것이다.
이 사건은 그들에게는 역린이지만 무질서를 통해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세상에는 기적 아닌 일이란 없는 것 같다. 순간순간이 기적이다. 기적은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다. 영국은 애증의 그녀다. 사랑과 증오가 나를 키운 것처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