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반세기를 접고 나는 뉴욕으로 왔다. 탐욕과 질투, 성냄과 어리석음을 벗어나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왔다. 내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영국에 있던 집과 재산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다 주고 혈혈단신 뉴욕으로 건너왔다.
뉴욕의 겨울은 춥고 어두웠다. 아무도 없는 뉴욕 한복판에서 나는 나에게로 가는 길의 첫 문을 열며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먹었듯이 나는 뉴욕에서 내 사상의 의지를 발현하여 사유로 지은 사상의 집을 만들리라 다짐했다. 나는 뉴욕의 좁은 방 한 칸에서 춥고 어두운 긴 겨울을 보냈다. 겨울은 절망의 계절이지만 나는 절망의 계절을 보내며 인간의 내면을 탐구했다.
부조리한 시대에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현명한 답을 얻고 싶었다. 역설적이지만 뉴욕의 가난한 방 한 칸은 사유의 바람이 춤을 출 수 있는 자유의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다 내어 주고 무일푼으로 온 나는 방 한 칸 옆에 딸린 작은 가게에서 낮에는 가발을 팔았다.
삶이란 먹고 사는 일의 연속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사유하는 단순하고 명쾌한 삶은 나를 정신적으로 자유롭게 했다. 사유의 열정은 뜨겁게 활활 타올랐다. 불꽃이 춤을 추듯이 정신적 자유는 지구 구석구석을 돌고 온 우주를 순례했다. 나는 무지개를 올라타고 마음이 갈 수 있는 곳까지 가고 또 갔다. 무지개가 갈 수 없는 곳은 없었다. 나는 무지개가 되었고 무지개는 내가 되어 온 세상천지를 돌아다녔다. 온 우주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사유와 한 몸이 되었다.
‘어레인보우’ 내가 지은 첫 번째 사유의 탑이다. 어레인보우와 나는 진리에 이르는 길을 찾았다. 진리는 종교의 독점이 될 수 없고 철학자의 독점도 될 수 없다. 진리는 그 진리를 만나서 깨달은 자들의 것이다. 진리는 이 지구 안에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것도 아니고 석가의 것도 아니다. 마호메트의 것도 아니고 공자의 것도 아니다. 나는 진리에 이르는 수많은 길 중에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 보았다. 그것은 내가 그토록 사유하고 또 사유하여 찾아낸 바로 그녀, 어레인보우였다.
내가 신이라면 다른 사람도 신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없다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이 진리다. 진리는 인간에게서 발현된다. 신에게서 오는 진리는 다 가짜다. 나는 그렇게 ‘어레인보우’라는 사유의 집을 완성해 나갔다. 한 방울의 물이 흘러서 바다에 가 닿으면 비로소 바다가 되듯이 냉정한 세상을 따뜻하고 명징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밤마다 언어의 별들을 밟으며 긴 밤을 사유 속을 서성이면서 부질없는 신의 영원을 버리고 인간의 아름다운 생을 찬미했다. 모든 이름 있는 존재에게 나는 ‘어레인보우’라는 이름을 달아 주었다. 인류가 여성에게서 시작되었듯이 어레인보우는 여성의 다른 이름이다. 여성이야말로 가장 성스러운 존재이며 여성은 인류의 마지막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어레인보우의 다른 이름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안에 있는 나의 본질이다. 나는 이 어레인부우와 함께 무지개를 올라타고 사유의 바다를 거닐며 진지하고 평화로운 문답을 통해 사유의 탑을 쌓아 갔다.
‘어레인보우여, 우리가 그토록 가고자 하는 천국은 어디에 있나요.’
태상, 그대는 천국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나요? 하늘에 하늘님이 있다면 땅에는 땅님이 있지요. 하늘님과 땅님이 서로 만나 어린아이를 탄생시켰지요. 그 어린아이가 바로 천국입니다. 하늘에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땅에 지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천국 그 자체입니다. 탐욕과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오염된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순수를 회복하면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괜히 천국을 찾는다고 인생을 허비하지 말아요.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어린아이라는 천국은 어떻게 지속성을 가질 수 있나요?’
어린아이 눈에는 모두가 꽃입니다. 어린아이 눈에는 모두가 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끼어들 공간이 없지요. 우주만물이 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함 그 자체입니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풀도 나무도 새도 다 어린아이 눈으로 보면 천국입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다 하나입니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다 하나입니다. 공주와 갈보도 하나이고 신부와 무당도 하나입니다. 주인과 머슴도 하나이고 스승과 제자도 하나입니다. 부모와 자식도 하나이고 남편과 아내도 하나입니다. 동물과 인간도 하나이고 식물과 광물도 하나입니다. 어린아이 눈에는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둘은 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천국을 지속시키는 길입니다. 태상, 당신은 천국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자신 안을 들여다보세요.
‘맞습니다. 내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내 안의 천국은 순간순간 짧게 느낄 수밖에 없어서 슬프지요. 어린아이가 돌아가는 순간은 참으로 짧지요. 영원히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면 천국이겠지만 어른인 나는 아직 어른아이로 가는 길을 다 열지 못했나 봅니다.’
이 지상에서 천국을 보지 못한다면 지구 밖 그 어디에도 천국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늘에 있다거나 우주에 있다거나 신에게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천국을 구경도 하지 못한 사람들이지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별 자체가 하늘님이고 어린아이고 천국입니다.
‘몇 년 전에 팔십 삼세로 타계하신 누님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 사시는 누님께서 매우 편찮으시다고 해서 병문안 갔다가 그날 밤 꿈에 새 한 마리가 누님 방에서 밖으로 날아가는 것을 봤는데 그다음 날 누님은 세상을 떠나셨지요. 숨이 멈춘 누님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평화롭게 잠든 아기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참모습이지요. 천국에서 왔다가 천국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는 평화 그 자체입니다. 어린아이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어린아이는 인간의 처음이지요.
‘어레인보우여, 저는 늘 인생이란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살아봐야 아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것밖에는 나도 모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알 수 있다면 인생이 아니겠지요.’
태상, 당신은 인생이라는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빠져나오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인생을 알 수 있겠지요. 탄생과 죽음은 인생의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인생뿐인가요. 우주도 마찬가지요. 굳이 인생에서 의미를 찾지 마십시오. 인생은 의미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인생은 개념에 불과합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꽃을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꺾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에게 꽃은 존재가 아니라 개념이겠지요.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버리면 마음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겁니다. 아, 알 수 없는 인생의 매력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가지 않는 길은 늘 매력이 있습니다. 인간은 젊을 때 배우고 늙어서 이해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인생이 무엇인가 의문을 가질 시간에 인생예술가가 되어 나를 재료로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어가는 게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태상,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나를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어레인보우, 당신이라는 에너지는 마음이지요, 나라는 에너지는 물질입니다. 당신은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당신이 동전의 앞면이라면 나는 동전의 뒷면이지요. 당신이 바다라면 나는 바다를 박차고 일어나는 파도입니다. 당신이 하늘이라면 나는 하늘을 걸어가는 구름이지요. 당신은 내가 지은 사유의 집입니다. 나는 그 사유의 집에 살고 있지요.’
맞습니다. 태상, 나는 당신이 지은 사유의 집입니다. 당신의 정신이 나의 전부일 수도 있고 당신의 흘린 눈물 한 방울이 나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더없이 신비로운데 인간의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식보다는 지혜의 눈을 밝혀야 합니다. 당신이 지혜의 눈으로 나를 찾아냈듯이 말입니다.
‘어레인보우, 우리 함께 춤을 춰요. 나는 이렇게 깊은 고요가 밀려오면 춤을 추고 싶어집니다. 고요 속에는 나를 흔들어 깨우는 우주의 파동이 느껴져요. 그 파동이 나를 감싸는데 춤을 추지 않고 배기겠어요? 하하하’
아, 좋습니다. 춤은 몸이 영혼을 불러오는 행위지요. 음악 없는 춤이란 파도 없는 바다와 같습니다. 흩날리는 바람이, 흐르는 물이, 쏟아지는 햇살이, 반짝이는 별이, 피어나는 꽃이 다 음악이지요. 음악은 춤의 등에 올라탄 무지개입니다. 둘은 하나가 되어 춤을 추지요. 우리처럼 말입니다. 우주의 모든 소리가 곧 음악입니다. 음악은 그래서 사랑의 다른 말이지요. 소리는 자연의 리듬입니다.
‘내가 어릴 때 지은 시를 보세요. 시는 노래가 되고 노래는 바람이 됩니다. 바람은 우주를 항해하는 범선입니다. 이 시는 지금 당신과 내가 있는 이곳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레인보우여, 우리 같이 노래해 봐요.’
졸졸졸졸
바다를 향해 흐르는 시냇물 소리
살랑살랑
들숨 날숨 사랑으로 쉬는 숨소리
쏴쏴쏴쏴
하늘 높이 시원하게 부는 바람소리
출렁출렁
봄꽃 가을 달 어울려 춤추다
철썩철썩
바닷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소리
똑똑똑똑
꽃잎에 떨어지는 빗방울소리
꾀꼴꾀꼴
봄날 나뭇가지에서 우는 꾀꼬리소리
개굴개굴
여름날 연못가에서 우는 개구리소리
귀뚤귀뚤
가을밤 풀숲에서 우는 귀뚜라미소리
부엉부엉
겨울날 산 속에서 우는 부엉이 소리
음악은 숨과 동의어입니다. 들숨과 날숨 사이로 한없이 경이롭고 신비한 파동을 만들어내지요. 음악은 살아있는 유기체 생물입니다. 어떠한 음악도 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늘과 땅이, 남자와 여자가, 동물과 식물이 우리 몸속에서 요동치는 생명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사랑하고 자손을 남기고 번성하게 되는 것이지요.
‘음악은 영감으로 만들어질까요. 어레인보우’
음악은 영감보다는 같은 에너지를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둠에서 빛이 분리되듯 달이 차오르다 사그라지듯 미묘한 에너지들이 서로를 밀거나 끌어당기는 것이 음악이 아닐까요? 우리가 음악에 감동받는 것은 청각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음악이라는 파동과 우주 구조 사이에 은밀하고도 신비로운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어서 일 것입니다.
‘어레인보우 당신이 음악이라는 파동을 타고 나에게 온 건 아닐까요? 하하하’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의 미세한 떨림이 당신의 에너지에 가 닿았겠지요. 당신이라는 호수에 던진 돌이 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의 에너지는 나를 깨웠겠지요. 그래서 서로 끌어당겨 음악으로 발기되었을지 모릅니다.
‘오, 멋진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무질서에서 질서를 찾은 것이겠지요. 여신님 신비롭게도 당신이 오르가니즘이면 나는 오르가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죠?’
하하하, 음악과 춤이 하나이듯 당신과 내가 하나인데 우리 자연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춥시다.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인생을 찬미합시다. 당신을 위해 시를 지었습니다. 들어보세요.
그렇다면 너도나도
우리 모두 다 함께
하늘과 땅 음과 양
남과 여 수컷과 암컷
산과 골짜기
우주삼라만상과 더불어
우리 각자 가슴 뛰는 대로
만만출세萬萬出世로다.
음악音樂-淫樂소리
성악聲樂-性樂을 즐기며
만만세萬萬歲를 부르자.
‘나를 위해 시를 지어주신 어레인보우여, 당신께 경배합니다. 이번에는 좀 껄끄러운 돈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요. 부富는 지혜로운 사람의 노예이자 바보의 주인이라고 로마시대 정치가 세네카는 말했지요.’
인도에서는 돈을 신으로 모십니다. 돈이 신이라면 인간은 뭘까요. 인도인들은 범인도교인 힌두교를 믿는데 그들에게 인생은 허무의 바다입니다. 물질은 돈과 비물질인 허무와의 충돌이 일어나는 곳이 인도이지요. 이렇듯 돈은 사람들에게 내면과 외면의 충돌을 일으키는 존재입니다.
‘오래전에 타계한 내 누이는 돈 때문에 삶과 죽음을 모두 잃었지요. 영리하고 똑똑했던 누이가 부동산 중개로 큰돈을 벌게 되자 동양학을 전공한 대학교수였던 누이의 남편은 교수직을 버리고 누이와 같이 돈 버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백만장자가 되어갈 무렵 누이의 남편은 가정을 돌보지 않고 돈 쓰는 재미에 빠져 망나니로 전락해 버렸지요. 누이는 큰 위자료를 주고 이혼을 했지만, 돈을 다 쓰고 탕자처럼 돌아온 남편을 애들을 위해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누이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누이의 남편이 청부살인을 한 것입니다. 결국 누이도 누이의 남편도 돈이라는 악마에게 당한 것이지요.’
돈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돈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누이나 누이의 남편이 돈이 아닌 둘만의 사랑 때문에 행복했다면 불행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이라는 탐욕이 개입되어 불행해진 것이지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양심이 돈이라는 물질을 다스릴 수 있었다면 불행은 멀리 달아났을 것입니다. 돈은 욕심의 한 부분입니다. 양심은 행복의 전체입니다. 부분이 전체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전체가 부분에게 먹히지 않게 깨어있어야 합니다. 돈은 욕심에 지배받고 양심은 정신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정신이 욕심을 이겨야 합니다. 욕심은 자아의 변형입니다. 자아가 욕심을 잘못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지혜로 완성됩니다. 지혜란 올바른 경험으로 실천하는 행위입니다. 어리석음을 깨치는 것이 지혜지요.
‘돈이라는 이름의 욕망을 양심으로 다스리는 것이 관건이겠군요.’
돈이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렇다고 돈과 인생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을 수 있는 걸까요? 돈을 포함한 모든 물질은 욕심이라는 에고가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욕심내는 자는 부자가 아닙니다. 욕심내는 자는 가난한 자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인간의 생존전략에 세팅되어 버리면 비열해집니다. 한 번 세팅되면 인생이 끝날 때까지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한 번 세팅된 사람이 그 사슬을 끊고 나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다른 외부적인 힘에 의해 제압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생존전략에 돈이 세팅되지 않도록 처음부터 지혜를 배워야겠군요.’
맞습니다. 그 방법을 찾는 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약 열흘간 자신이 중독되어 있는 대상에게 접촉해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돈이든 사람이든 질투든 욕망이든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접촉하지 않고 견디어 보면 자신의 집착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이 의지하는 대상입니다. 의지하는 대상에게서 자유로워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레인보우,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지혜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상, 이번에는 내가 당신에게 섹스에 관해 물어볼게요. 당신은 섹스를 통해 무엇을 얻나요? 섹스는 인간에게 무엇일까요?
‘섹스는 우주라는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족 번식을 위한 성적인 면만 본다면 섹스는 큰 의미를 두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섹스란 종족 번식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내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성교가 가능하도록 한다면 사랑의 결실인 어린아이가 생길 것입니다. 조물주는 돈으로 몸을 팔고 사는 매음행위나 폭력으로 벌어지는 강간이 사랑이 아님을 좌시하지 않았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남녀가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 흥분과 기대, 자극과 재미, 스릴과 서스펜스를 통해 끊임없이 유전자를 복사해서 이 우주를 돌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궤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내 솔직한 심정입니다.’
섹스는 죽음을 무릅쓴 생의 찬가입니다. 섹스는 생물학적으로 볼 때 수컷의 씨를 받아 종족 번식의 책임과 창조의 기쁨을 동시에 누릴 수 있지요. 특히 우수한 종자를 받기 위해 수많은 후보 가운데 가장 유능한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암컷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재밌는 건 암컷 사마귀는 교미 후에 수놈을 잡아먹는다지요. 인간은 동물과 다르지만, 인간도 자연이라는 큰 틀에서 동물입니다. 우리 인간은 섹스는 자손 번식과 최고의 쾌락을 동시에 가질 수 있지요.
‘인간에게 섹스는 양면의 칼날이군요.’
섹스는 우리 인간에게 영원한 숙제일지 모릅니다. 쾌락이라는 최고의 즐거움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지만 섹스와 사랑이라는 두 얼굴은 인간을 난처하게 하기도 하지요. 사랑 없는 섹스도 가능한 것이 인간 아닐까요. 그래서 인간 역사에는 공창과 사창이 늘 함께했지요.
‘공창이나 사창이 인간의 성적 욕망의 쓰레기통으로 전락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인간은 정신이라는 좀 더 성숙된 장치가 있지 않습니까. 정신이 몸을 지배할 수 있지요. 몸이라는 본능을 정신이라는 상위개념이 다스릴 수 있지요.’
처음 만물이 디자인되었을 때 이미 우리의 세포 안에 섹스라는 것은 조절 가능하게 디자인되었을 것입니다. 그걸 부정하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지요. 특히 남성들은 영원토록 섹스를 원하도록 설계되어 있지요. 자신의 씨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고 해도 그걸 제어할 수 있는 정신 또한 설계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볼수록 설계자가 가장 정교하고 완벽하게 만든 작품이 우리 인간 아닐까요.
‘어레인보우, 그 정교한 작품인 우리 인간도 때론 에러가 날 때가 종종 있지요. 인간에게 섹스의 쾌감이 없다면 얼마나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야 했을까요. 젊을 때의 사랑은 호르몬 작용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섹스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완벽한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감은 섹스를 통해서 완성되지요.’
몸으로 최고의 쾌감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도 책을 읽고 공부하는 즐거움, 사랑하는 사람과 변함없는 애정을 나누는 즐거움, 술잔을 기우리며 인생을 논하는 즐거움을 인생삼락으로 삼았겠습니까. 에로티즘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이기에 비 온 뒤 모텔은 죽순처럼 싱싱하게 자라나고 복음처럼 비아그라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것이겠지요.
‘하하하 통쾌한 말씀입니다. 어레인보우’
섹스는 부끄러워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가장 숭고한 것 중의 하나지요. 섹스라는 사랑 없인 약육강식의 카오스만 존재할 뿐입니다. 오로라도 무지개도 볼 수 없는 생지옥이 되겠지요. 사랑을 모르는 몸이란 영혼 없는 송장이나 마찬가지지요.
‘어레인보우, 사랑과 질투는 세트지요. 질투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면 그건 신의 사랑뿐이겠지요. 1970년대 나는 직장 관계로 영국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었는데 영국으로 출장을 온 한국의 젊은 은행장의 일화가 영국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지요. 영국 바닷가 휴양지의 한 호텔에 한국의 젊은 은행장과 부인이 투숙했지요. 룸서비스로 샴페인을 주문한 젊은 은행장은 영국웨이터에게 자신의 아내와 섹스해달라며 후한 팁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이 웨이터가 깜짝 놀라 경찰에 신고한 사건은 영국사회를 놀라게 했지요. 나는 그 기사를 보면서 나는 혼자 추리를 좀 해봤었지요. 이 젊은 은행장이 변태 성도착증이나 관음증일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성 기능이 시원치 않아 아내를 성적으로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보상심리에서 취한 하나의 극단적인 방식일 수도 있지요. 또는 아내를 너무 극진히 사랑하다 보니 두 사람 사이의 너무 익숙해지고 지루해진 성생활에 좀 색다른 자극과 흥분이란 맛과 멋을 주려던 깊은 배려하는 마음이었던 것인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이 인간의 본능이듯이 질투는 생물의 본능입니다. 가톨릭에서는 교만, 질투,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색욕을 7대 죄악으로 규정해 놓았습니다. 유교에서도 칠거지악이 있지요. 그것뿐인가요. 반면 발칸반도 문화권과 이슬람에서는 질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기도 했습니다. 질투는 사회성을 갖추고 서열이 존재하는 동물 집단과 인간에게는 필연적인 것이지요. 사랑은 섹스라는 쾌락으로 질투는 양념처럼 맛있는 인간관계를 형성해 주지요. 섹스를 통해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오감을 적절하게 조절할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면 마치 축구선수가 자살골을 넣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조절 능력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이야말로 사랑과 섹스 그리고 질투를 가장 완벽하게 다스리는 비법입니다.
‘어레인보우, 내가 겪은 이야기를 해볼게요. 대학교 다닐 때 사귀던 그녀와 헤어진 후 이십오 년 만에 유명한 소설가가 된 그녀를 극적으로 뉴욕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는 자기 여동생과 나에게 파격적인 제의를 했습니다. 태상, 당신이 섹스를 아주 잘하니까 내 여동생과 한번 해보면 좋겠습니다. 여동생은 승낙했으니 당신만 결정하면 아주 훌륭한 섹스가 될 것이라고 했지요. 소심하고 용기 없는 나는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기존 사회의 도덕이나 통념을 초월한 그녀는 인간이 만든 질서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기행이었습니다. 누구와 섹스하던 괘념치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그녀가 제안한 섹스를 정의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저 하늘에 있는 별만큼이나 다양한 일이 일어나니까요. 기행이나 도덕을 정의하는 것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섹스는 관능적 충동이 아닙니다. 섹스는 정신으로 하고 몸으로 다스리는 완벽한 생명 활동입니다. 섹스를 신체적인 욕망의 실현으로만 인식한다면 그건 옳은 일이 아닙니다. 섹스는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 내는 우주의 울림이며 수많은 정보를 교환하는 장이 섹스입니다. 섹스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몸과 정신이 만들어 내는 가장 진보된 하모니일 뿐입니다.
‘이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요.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어레인보우’
어렵군요. 죽음을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당신도 나도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요. 죽음은 자연스런 자연의 질서지요. 죽음은 삶에 있어서 하나의 변화에 불과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건 죽음이지요. 이는 종교가 끊임없이 세뇌한 탓일까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시한부입니다.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 풀고자 했던 오래된 숙제이죠. 종교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모든 문명의 시작에는 죽음과 영원의 문제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나도 이제 인생을 정리할 나이에 와 있습니다. 나에게도 죽음은 풀지 못한 숙제지요.’
철학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인간의 죽음을 아직은 풀 수 없습니다. 생명활동의 정지가 죽음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럼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을 먼저 규정하지 않고는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공자는 삶도 다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냐고 했다지요.’
맞습니다. 죽음은 그 본질을 다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만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피할 수 없지요. 우리는 모두 자기가 아는 만큼만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의식으로 배워서 아는 것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의 전부지요.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잘 죽는 것이 죽음에 대한 예의 아닐까요?’
설계자의 프로그램대로 움직이는 우주는 바보처럼 정직합니다. 삶도 죽음도 그 프로그램을 벗어나지 못하지요. 원효는 죽음도 고통이고 태어남도 고통이라고 했지요. 삶과 죽음이 다 고통이라는 것은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삶처럼 죽음도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의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지요.
‘어레인보우, 우리나라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지요. 이는 삶에 대한 강렬한 애착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죽음이 몸이라는 물질에 대한 재난이나 테러 정도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요.’
살아야 할 때 죽는 것은 천벌이고 죽어야 할 때 사는 것도 천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종교가 생겨나고 종교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몸이라는 물질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의하면 몸이라는 에너지가 소멸해도 이 우주 안에 고스란히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죽음은 에너지 형태가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죠.
‘생각해 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관건이겠군요.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각인된 오랜 열망의 디엔에이겠지요. 그래서 오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하고 저승의 백 년보다 이승의 일 년이 낫다는 말도 있지요.’
인간은 몸이라는 물질을 가지고 영원이라는 완전성을 얻기 힘듭니다. 물질은 소멸하고 다시 생성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의 진리지요. ‘으앙’하고 태어나서 ‘깔딱’하고 숨이 넘어갈 때까지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됩니다. 자연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면 우리 몸에는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이 있지요. 생일노래가 있으면 죽음노래도 있습니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습니다. 그저 자연의 프로그램대로 자연스럽게 살면서 우리 안의 또 다른 우리인 신을 만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안에 있는 내가 신입니다. 그 신은 영원불멸하지요. 그 신을 만나기 위해 부단히 나를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의 신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면 됩니다.
‘어레인보우,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바로 신이라고 했는데 그 신을 바로 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그 길을 알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 아닐까요. 그래서 종교가 생겨나고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누구 그 길을 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설계자가 만든 우리 몸이라는 물질의 한계를 넘은 사람은 없습니다. 물질이라는 한계로는 설계자의 뜻을 모른다는 이야기지요. 종교가 알았다고 하고 철학자가 밝혀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나 상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과학자가 증명했다는 것도 사실은 물질을 근거로 비물질을 추정해 낸 것에 불과합니다.
‘죽음을 묻는 것은 우주 탄생을 묻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군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우주 탄생이나 빅뱅이나 천지창조나 태초나 진화론이나 죽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미시적인 설명은 가능하지만, 근원적인 설명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탄생도 죽음도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석가도 예수도 삶과 죽음을 이야기했지요. 그렇지만 죽음 그 자체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모를 뿐, 삶도 죽음도 모를 뿐입니다.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