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 길에 오른 충무공 이순신은 4월 5일 고향 아산에 이르렀다. 아산에 머물던 시기인 4월 13일 어머니 변씨 부인의 상을 당한 충무공은 같은 달 19일까지 장례를 치른 다음 다시 남쪽으로 백의종군 길을 떠났다.
고향 아산에 잠시 머무는 동안 이웃 사람인 '강 계장'이라는 인물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충무공은 강씨 집안에 들러 조문을 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8일
강 계장이 세상을 떠나서 내가 조문을 갔다가 이어 홍석견의 집에 들렀다.
[원문] 姜禊長永世 余徃弔 因見洪石堅家.
『난중일기』, 1597년 4월 18일
늦게 계원들로 하여금 내가 있는 곳으로 모이게 하여 계에 대한 일을 의논하고 헤어졌다.
[원문] 晩 禊中令会于余在處 議禊事而罷.
『난중일기』, 1597년 4월 19일
금곡의 강 선전의 집 앞에 이르러 강정, 강영수씨를 만나 말에서 내려 곡을 하였다.
[원문] 行到金谷姜宣傳家前 逢姜晶姜永壽氏 下馬哭.
4월 8일 일기에 언급된 '계장'은 우리나라 전통 협동조직인 계회(契會)의 회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회장의 성이 강씨였기 때문에 일기에서 '강 계장'이라고 칭한 것이다. 4월 18일 일기에 계원들을 모아 계회의 일을 의논했다고 한 이유도 강 계장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4월 19일 일기에 '강 선전'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곡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강 계장은 선전관을 지낸 이력이 있었던 것 같다.
4월 19일 일기에 언급된 금곡은 지금의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리 일대의 옛 지명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온양에 속했던 곳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금곡초등학교 등 금곡 지명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조선의 명재상인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기거했다고 알려진 아산 맹씨 행단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충무공의 생가가 있던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현충사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오면 금곡에 이르므로 충무공은 19일 변씨 부인의 장례를 치르고 백의종군 길을 가는 중간에 강 계장의 집에 들러 조문을 한 것 같다.
충무공의 고향 아산시는 진주강씨 은열공파(殷烈公派) 10세손인 강자위(姜自渭), 강자해(姜自海) 형제가 입향한 지역으로서, 지금도 이곳에는 그 후손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진주강씨세보』에도 강자위, 강자해 후손들의 묘가 주로 온양, 아산 지역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아산 일대에 정착하면서 어느 정도 명망이 있는 사족(士族)으로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강자위의 셋째 아들인 강문익(姜文翼)이 조선의 제2대 국왕인 정종의 5녀 상원옹주(祥原翁主)의 손녀와 혼인한 점만 보아도 그러하다. 『평양조씨대동보』에 따르면 정종의 5녀 상원옹주는 평양조씨 조효산(趙孝山)과 혼인을 하여 1남 1녀를 낳았는데, 그들 가운데 아들인 조벽(趙璧)이 외동딸(강문익의 부인)만을 두는 바람에 더 이상 조효산의 대는 이어지지 못하였다.
위 4월 19일 일기에 등장하는 강영수(姜永壽)는 바로 강문익의 증손자이다. 『진주강씨세보』에 따르면 강영수의 생몰년이 경자년~정묘년(1540~1627년)이니 『난중일기』의 기록과도 시기적으로 부합한다. 또한 『진주강씨세보』는 강영수와 그의 아버지·할아버지의 묘가 모두 아산에 있다고 기록하였으니 강영수는 아산 지역에 정착한 사족임을 알 수 있다.
위 4월 19일 일기에 등장하는 강정(姜晶)은 입향조 강자해의 첫째 아들인 강영로(姜英老)의 손자이다. 『진주강씨세보』에 따르면 강자해부터 강정에 이르기까지 강씨 후손들의 묘는 온양 남면 백악동(白岳洞)에 세워졌는데, 백악동은 금곡과 가까운 지금의 아산시 송악면 동화2리 배골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진주강씨세보』는 입향조 강자위의 둘째 아들 강문필(姜文弼)의 손자 강용수(姜龍壽)의 행적이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었다고 기록하였다. 『난중일기』 1593년 6월 2일 일기에 '온양의 강용수가 명함을 놓고 갔다.'라는 기록과 '강용수에게 양식 5말을 줘서 보냈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강용수는 앞에서 언급한 '강 계장(강 선전관)'과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난중일기』에 나타난 진주강씨 인물들에 대한 언급은 언뜻 보기에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임진왜란 시기 아산 주변에 진주강씨 후손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진주강씨세보』의 관련 기록을 함께 종합하여 살펴보면, 충무공 가문인 덕수이씨와 진주강씨 사족들 간의 친분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사료적 배경이 구성된다. 이는 종종 역사학계에서 거론되는 조선시대 재지사족(在地士族)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이해된다.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 디지털아산문화대전
『진주강씨세보(晉州姜氏世譜)』, 한국족보정보(GOK)
『평양조씨대동보(平壤趙氏大同譜)』, 평양조씨대종회 홈페이지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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