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전 세계적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TV 드라마가 있었다. 영국에서 만든 ‘어느 한 공주의 죽음’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공주와 그의 애인이 간통죄로 사형당한 실화를 소재로 만든 이 TV 극영화가 1980년 영국에서 처음 방영된 후 일어난 국제적인 논란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한낱 ‘찻잔 속의 폭풍’ 같이 대수롭지 않았을지 몰라도 아랍 사람들에게는 회교도를 심하게 모욕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이 사건이 아랍인들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억울함을 대변해 줄 ‘러셀법정’을 대신했는지 모르겠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미샬 공주는 이슬람교라는 보이지 않는 경계 안에서도 밖에서도 살 수 없었다. 이 비극적인 공주의 운명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 충돌하는 그 소용돌이에 말려든 아랍인들의 운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자대비한 알라’ 신을 부르면서 회교사원으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죄인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다. 이들은 사형당하는 공주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라와 땅을 뺏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죽을 각오 외에는 다른 아무 표정도 없는 공주를 용감무쌍한 한 독립운동가로 상상했을 것이고, 광신적인 이슬람교도들은 ‘죗값을 치르는 나를 보라’고 행동으로 말하는 공주를 한 순교자로 보았을 것이다.
두 사람의 증인 진술이 똑같았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역시 아랍인이었던 ‘오셀로’가 말한 것 같이 공주는 갈보였다. 따라서 마땅한 벌을 받는다고 신경질적으로 한 시녀가 궁중 생활을 얘기한다.
“온종일 종들 말고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요. 낮 열두 시 전에 아무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요. 그럼 뭣들 하느냐고요? 아무것도 안 하지요. 그럼 운동도 안 하느냐고요? 물론 하지요. 성교행위를. 텔레비전을 줄곧 켜놓고 ‘사운드 오브 뮤직’같은 카세트 곡을 열 번, 스무 번씩 듣고 팝가요 인기곡을 런던서 비행기로 실어 오고. 미샬 공주가 즐겨 듣던 노래는 ‘나를 위한 입맞춤’이었지요. 이 노래는 수도 없이 들었어요.”
또 한 시녀가 말한다.
“공주에게 어떤 특권과 자유가 있었느냐고요? 섹스였었지요.”
공주들은 복잡하고 위험한 성생활을 한단다. 이들의 경우 남자가 여자를 고르는 것이 아니고 여자가 남자를 고른다. 남자가 여자를 고를 수 없는 것은 여자가 얼굴에 쓴 베일 때문이란다. 사막에 길이 나 있고 매력 있는 남자를 발견하면 그 남자의 자동차 번호판 번호를 적어 두었다가 자기 운전기사를 시켜 접촉한단다. 가엾은 것, 다른 공주들 몫까지 대신해서 벌 받는 것이란다.
미샬 공주는 텔레비전에서 본 기타 치는 남자와 정을 통하다가 들켰단다. 재판도 받지 않고 “나는 간통했습니다.” “나는 간통했습니다.” “나는 간통했습니다.” 세 번의 자백으로 충분했다. 영화 화면으로 계속 반복되는 영상이 있었다. 언제나 운전기사가 모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안락한 뒷좌석에 앉아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인들, 눈부신 불빛 속에 춤추는 남자들을 보면서 상대를 골라잡는 남자 사냥꾼들이었다.
내가 이 실화 극영화를 본 기억으로는 너무도 운명적으로 희, 비극적으로 여자는 모래더미 앞에 세워진 채 총살당하고 그 여자의 먹이였던 남자는 공중 주차장에서 참수당한다. ‘어느 한 공주의 죽음’이 아랍산 기름의 아이러니였을까? 그렇지 않다면 인생의 허다한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한 방울의 기름을 신기루가 아니라면 하나의 거울로 삼아 우리 자신을 반성해 봐야 할 것 같다.
보는 사람의 관점이 어떻든 간에 이 TV극영화가 빚은 물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 인간사회에 만연한 온갖 위선과 독선에 찬 편견과 선입견을 잘 드러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세속화될 대로 세속화되고 상업화된 기독교와 깊은 환멸에서 부흥을 꿈꾸는 회교 사이에서 말이다. 그 당시 사우디아라비아가 그토록 강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이 영화가 사우디 왕실의 치부를 다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좀 더 깊이 관찰하면 그동안 오래도록 쌓여 온 분노가 터졌을 수도 있다. 흔히 서양의 신문 잡지 특히 TV 화면에 조롱조로 우스꽝스럽게 비친 아랍 사람들의 모습이 그들에게 얼마나 모욕적이었을까? 이것은 비단 아랍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유색인종들이 다 같이 느껴온 수모일 것이다.
오늘날도 우월감에 사로잡힌 많은 백인이 유색인들을 원숭이나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오만방자한 태도 때문일 것이다. 다반사 같이 일어나는 살인, 강도, 강간, 폭력, 마약으로 병들대로 병든 서구사회 백인들이 회교국 아라비아 사회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랍 사람들에게는 아마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흉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서양의 백인들이 정의를 운운할 때처럼 아랍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몸부림치다 처참한 죽음을 맞은 공주의 운명과 백인들 농간에 맥없이 희생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운명이 비슷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 비유는 맞지 않다고 많은 아랍인은 말할 것이다.
한 가지 크게 다른 점은 공주는 이슬람교의 법률을 알면서 어겼다는 것이다. 간통하다 들키면 그 벌이 사형이란 것을 잘 알면서 그 법을 어긴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운명이 가혹하긴 했지만, 이슬람교의 법률상으로는 엄격한 의미에서 사회정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무런 법도 어긴 것이 없는데 결코 자초하지 않은 벌을 받게 된 것이다.
공주의 운명은 극히 야만적인 비극으로 느끼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억울함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서구 사람들에 대해 아랍 사람들이 어떻게 느낄는지 상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들은 가슴으로 울부짖을 것이다. 공주는 이미 죽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제 나라 제 땅에서 사람답게 살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다고. 왜냐하면 세계이차대전 이후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유태인들의 돈과 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이처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간통으로 처형당한 공주의 죄와 벌에 대해 각자 어떻게 느꼈던 간에 모든 아랍 사람들이 볼 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취한 서구 백인들의 행동이야말로 더할 수 없이 야만적인 만행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서양의 백인들 특히 유태인들이 자기네만 옳고 잘났다고 ‘혼자 잘났어, 정말’ 자기네 주의 주장만 진리라고, 자기네가 믿는 종교만 참 종교라고 큰소리치는 것은 온당치 못하고 지혜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제넘고 위험천만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유치무쌍한 정신 상태야말로 서양문화의 천박성과 미숙함을 드러내고 모든 다른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 뿐이다. 세계 도처에서 그동안 억압받고 착취당해 온 사람들이 특히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의 인종적, 종교적 독재와 횡포에 항거, 봉기하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루속히 백인들도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해서 치졸한 우월감을 졸업할 때 그리고 이들이 더 이상 함부로 못된 짓 하지 못하게 또 버르장머리 없이 굴지 못하도록 모든 유색인종들이 서로 다투지 말고 단결해서 힘을 모아 본때를 보여줄 때 비로소 모든 사람의 인권이 존중되는 진정한 ‘자유세계’가 찾아올 것이다.
이런 뜻에서 ‘어느 한 공주의 죽음’이 우리 모든 평민 가운데 눈엣가시처럼 존재해 온 귀족과 왕족의 종말을 고하고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의 끝장을 보게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랴.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