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육산의 으뜸, 겨울 소백산(小白山)

여계봉 선임기자

산은 제 발로 찾아가지 않으면 저절로 오는 법이 없다. 산행 버스를 타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집을 나선다. 

 

소백산은 겨울 산의 대명사이다. 겨울이면 언제나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소백산은 비로봉, 국망봉, 연화봉, 도솔봉 등의 대간 봉우리들이 연봉을 이루어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운 산세로 장관을 연출한다. 버스 안에서 잠시 후 대간의 능선을 따라가면서 펼쳐질 대설원의 장쾌함을 연상하니 벌써부터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작은 전율이 솟구친다.

 

오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소백산 산행의 들머리는 단양 쪽 어의곡리다. 어의곡 코스는 정상인 비로봉까지 경사가 심하지 않고 비교적 짧은 거리인지라 등산객들이 선호하는 등로다. 하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상월봉으로 올랐다가 국망봉을 거쳐 비로봉으로 가면 백두대간의 진수를 오래 즐길 수 있다.

 

겨울 소백산은 지금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어있다.

 

눈을 밟는 아이젠 소리가 고적한 산길의 적막을 깬다. 몸이 길을 가지만 정작 앞서가는 건 마음이다. 마음을 움직여 무소의 뿔처럼 눈 덮인 산길을 걷다 보면 야릇하도록 쓸쓸한 정취 속에서 몸은 고단하나 오히려 영혼은 맑아진다. 겨울 산은 수목과 잡초, 산짐승과 미물조차 삼매의 경지에 든 듯 조용하다. 봉우리는 아득하고 눈길을 한 발 한 발 무심하게 걷는다. 계곡 왼쪽 응달에는 껑충 큰 이깔나무들이 눈꽃을 피운 채 서 있다. 바람이 지나가자 나무에 달린 눈꽃들이 우수수 흩날린다.

 

설화가 만발한 대평원의 사스레나무

 

대평원 아래 눈을 덮어쓴  사스레나무 군락지에 접어들면 비로소 소백의 품으로 접어들었음을 실감한다. 오름을 계속하면 시야가 탁 트이면서 소백의 대평원이 눈앞에 펼쳐져야 하지만 눈보라가 앞을 가려 시계는 거의 제로 상태다. 대평원에서 북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비로봉에서 국망봉, 상월봉, 늦은맥이재, 고치령까지 부드러운 백두대간 마루금이 이어지는데 그 멋진 풍경을 볼 수 없으니 오늘은 머리 속에 들어있는 대간 길을 끄집어내야 한다. 

 

거친 눈보라와 강풍을 뚫고 산행 들머리에서 2시간 반 만에 정상인 비로봉(1,439m)에 도착한다. 비로봉 정상에 서면 남으로 연화봉, 도솔봉, 묘적봉이, 북으로는 국망봉이 끝없는 대간 산그리메를 이룬다. '비로(毘盧)'는 불교에서 '높다'는 뜻으로 쓰인다. '비로자나(毘盧遮那)'는 '모든 곳에 두루 비치는 부처의 몸의 빛'을 뜻한다. 산에 붙여진 비로봉은 그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즉 최고봉을 가리키는 말로 전용되어 아예 산봉우리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강한 눈보라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정상의 비로봉 일대

 

소백산은 행정구역상 임자가 둘이다. 능선을 기준으로 북쪽은 단양, 남쪽은 영주인데, 두 지방자치단체 간 소백산에 대한 애정과 집념이 대단해서 매년 5월의 소백산 철쭉 축제도 단양과 영주에서 일주일 사이로 따로 열고 있다.

 

소백산은 겨울 설화와 상고대, 그리고 첩첩의 산줄기와 장쾌한 능선미가 장관이지만, 분수령을 넘나드는 칼바람 또한 나라 안에서 최고다. 소백산은 자주 비교되는 근처 태백산보다 100m 정도 낮지만, 고봉들이 줄지어 서 있어 산세는 그보다 더 장엄하고 계곡이 길며 그윽하여 수려한 맛도 한층 더하다. 하지만 분수령을 넘나드는 칼바람은 웬만한 돌멩이는 모두 날려 버릴 정도로 드세다. 동부에서 서남 방면으로 뻗어 내린 소백의 능선이 늘 북풍을 맞받기 때문이다. 

 

소백산 정상 비로봉에서 겨울 산행의 진수를 느낀 악우(嶽友)들

 

조선 명종 때 남사고(南師古) 선생이 소백산에 올라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감탄하면서 절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소백산은 사람과 닮아있다는 뜻이다. 요즘 속세에서 이기심과 탐욕으로 가득 찬 아수라 같은 사람들이 벌이고 있는 저주의 굿판을 소백의 삭풍(朔風)으로 날려 보내 사람을 살리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절을 올린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이 동해로 치우쳐 흐르다가 태백 매봉산부터 내륙으로 들어와 태백산을 거쳐 빗어낸 소백산은 우리나라 육산의 으뜸이다. 국망봉에서 죽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하얀 속살을 보며 대간과 사랑을 속삭이게 되고, 결국 백두대간과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린다.

 

비로봉에서 죽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하얀 속살

 

높은 곳에 오르면 일상의 높이에서 볼 수 없는 세상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산을 오르면서 서로 가까워지는 것은 함께 땀을 흘리면서도 이런 즐거움이 주는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리라. 환희심이 지나친 것일까? 끝 간 데 펼쳐진 설원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고 싶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군락과 어우러진 비로봉 일대의 설화와 상고대는 대자연의 신비로움 그 자체다.

 

소백산은 천년고찰을 품고 있는 한국 불교의 성지이기도 하다. 국망봉 남동쪽에 초암사, 비로봉 남쪽에 비로사, 연화봉 남서쪽에 희방사, 산 동쪽의 부석사, 북쪽엔 천태종의 본산인 구인사가 있다. 그리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단종의 삼촌 금성대군은 소백산의 산신령으로 추앙되어 산자락 고치령 고개 산신각에 모셔져 있다.

 

기상관측소 너머로 죽령에서 이어지는 대간의 도솔봉, 묘적봉 산군이 버티고 서있다. 여인의 육체처럼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대평원의 장쾌함은 어디서나 돋보인다. 이제 함께 했던 대간을 버려야 할 시간이다. 대간 능선길 삼거리에서 천동계곡 쪽으로 내려선다. 이곳에서 산 날머리 천동리까지 약 7km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천동리 방향으로 내려서면 주목들이 산정에서 고생했노라 위로해준다.

 

산정에서 천동리 방향으로 내려와 주목 군락지 아래에서 느긋하게 즐기는 단출한 식사는 세상 어느 만찬도 부럽지 않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소백산 칼바람도 주목 아래에서는 유순하기 그지없다. 하산길에 나오는 천동리는 옛 지명이 샘골이었고,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 천동(泉洞)이다. 근처 천동 쉼터에서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어간다. 이곳에 오늘은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바람이 분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걸은 사람들은 서로의 낮은 숨결마저도 읽을 수 있는 사이가 된다.

 

인적 없는 천동 쉼터에는 평화로움이 넘친다.

 

올 5월이면 만개할 철쭉군락지를 지나 키 큰 아름드리 소나무와 전나무의 안내를 받으면서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 산 날머리 천동리가 나온다. 다리 아래로 소백산 깊은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깨끗한 물줄기가 휘돌아 흐르며, 주위 숲은 깊은 골짜기에서 배어 나오는 상큼한 공기로 찾는 이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이 지역 출신 산악인 허영호씨가 소백산을 오를 때 이 코스를 자주 이용했다 하여 근처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다리안 관광지에 우리 산하를 숱하게 오르내리며 밝혀낸 백두대간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신 고산자(古山子) 김정호 선생 추모비가 눈길을 끈다.

 

다리안 계곡의 소백산교와 산악인 허영호 기념비 

 

반야심경과 금강경에서 공(空)은 청정한 마음을 낸다는 뜻인데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생겨난 마음이 바로 청정한 마음이고, 이것이 바로 공(空)이다. 오늘 소백산에서 어렵게 얻은 공(空)에 욕(欲)이 쉽게 채워지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귀경버스에 몸을 싣는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5.01.23 11:21 수정 2025.01.23 17:32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여계봉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