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리(1913-1995) 선생은 경북 경주 출생으로 소설가이며 시인이다. 1934년 시 백로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함으로써 등단하였고 이후 소설로 전향하면서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화랑의 후예',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산화'가 당선되면서 소설가로서의 위치를 다졌다. 김동리 선생의 작품 특징은 한국인의 삶과 정신을 깊이 있게 탐구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의 궁극적인 모습을 이해하려는 끈질긴 노력을 보여 주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무녀도' '등신불', '을화'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쌍룡이 굴러오는 바위에 맞아 죽은 곳이라거나, 두 용이 잠자리를 가지지 말란 신의 명령을 어긴 덕에 여의주를 뺏기고 둘이 치고받고 싸웠다거나, 피가 가득 배어 있는 마을이라는 전설을 가진 이 마을에서 '장수'가 나면 역적이 되거나 불효자가 될 것이라는 운명으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그곳에서 '억쇠'가 태어나고, 억쇠가 고을의 돌을 열두 살에 들어 보임으로써 큰아버지는 불행의 싹을 잘라 버려야 한다며 도끼를 들고 아이의 어깨를 끊어버리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도끼자루를 잡고 말리는 바람에 끊지 못하고 억쇠는 주체 못하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매일 돌을 들고 산속을 혼자 오가며 힘을 홀로 소진한다. 심지어는 낫을 들어 자신의 어깨 힘줄을 스스로 끊어내기까지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멧돼지 같은 남자 ‘득보’가 스며든다. 어느 마을에서 형제들과 싸우다 형제를 죽여 도망쳤다거나, 서울에서 사기를 치고 도망을 쳐서 이 마을까지 굴러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데 억쇠는 그와의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고 그와의 힘겨루기 끝에 호적수임을 알아차린다.
난봉꾼인 득보는 여자를 며칠이고 데리고 왔다가 여자가 못 이겨 도망가는 일들이 잦은데 억쇠의 아내 ‘분이’도 마찬가지다. 득보가 자신의 조카라는 분이를 억지로 억쇠에게 주면서 억쇠는 득보와 분이의 관계를 의심하는데 분이는 득보네 집에서 스무날이고 자고 오는 날도 있다. 억쇠는 분이와 관계가 소원하니 자식을 볼 일이 없는데 마침 과부가 된 주막집 ‘설희’라는 처자를 들이게 되고, 억쇠는 아내가 둘이 된다.
그런데 득보가 자꾸 낮에 집에 와서 설이에게 추근거리는 거다. 분이는 이런 설이를 질투하여 임신한 설이와 득보가 둘이서 있던 집에 들어가 부엌칼로 둘을 찌르고 도망간다. 이로 인해 설이는 죽고, 득보는 가슴이 패여 쇠약해진다. 피바다가 된 방에 들어선 억쇠는 득보가 죽을까봐 걱정하고 득보는 분이를 찾으러 떠난다. 그리고 얼마 후 득보는 열두 살 쯤 먹어 보이는 계집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온다. 분이가 열여섯에 낳았다는 그 딸을 데리고 다시 마을로 온 것이다.
억쇠와 득보는 타고난 자신들의 힘을 왜 이처럼 무의미하게 소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힘을 쓸 곳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무의미한 힘겨루기를 반복하는 두 주인공의 비극적 운명은 힘을 써서 이루어야 할 국가도, 미래도 가지지 못한 식민지 조선인의 운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김동리 선생의 고백에 따르면 '황토기'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은 자신이 보고 들은 전설이라고 한다. 다솔사의 ‘만허 선사’에게서 싸움만 하다가 늙어 죽은 두 장사의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나라 전역에 퍼져있는 아기장수 설화, 용으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설화 등은 타고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원통하게 불우한 삶을 보내야 했던 우리 민족의 한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것의 소설적 형상화 시도가 바로 황토기라 할 수 있다.
'황토기'는 운명의 절대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소설에서는 운명을 타개해 나가려는 조금의 시도도 없다. 이 작품은 치정에 치우친 작품이라기보다 처음부터 끝까지 싸움으로 일관한다. 두 장사의 소모적인 힘의 배설이다. 이를 통해 일제 치하 우리민족의 삶과 연결해 해석할 수도 있고 늘 치고받고 싸우며 타인 위에 올라서려 하는 인간 본성의 잘못됨을 비판하며 아무 소용 없는 헛짓거리라는 허무주의의 강력한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작품이 어려워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집을 수 없었으나 이 소설의 서두에서 나온 승천하려던 쌍룡 한 쌍이 그 전날 밤 잠자리를 삼가지 않은 죄로 천왕의 노여움을 사 천왕이 여의주를 하늘에 묻었고, 쌍용은 슬픔을 못 이겨 서로 머리를 물어뜯고 피를 흘려 이 황토 골이 생겼다는 내용에서 볼 때 여의주를 천왕에게 빼앗긴 한 쌍의 용이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싸우기만 하는 어리석음을 본다. 두 마리의 용은 주인공 억소와 득보인 것이다.
소설에서 설희도 죽고, 설희를 죽인 분이도 떠나가 버린 세상에서 억쇠나 득보는 여의주를 잃은 한 쌍의 용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둘이 아무리 싸워도 설희가 살아날 리 없고 분이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계속 싸운다. 결국은 그들의 싸움은 쓸데없는 싸움이다. 억쇠와 득보의 힘은 그들의 삶 전부인데 그들은 아무 의미 없는 싸움을 위해 소중한 삶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그 힘을 가지고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짓는데 더 노력을 경주했다면 둘은 만석지기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의 세상도 마찬가지다. 서로 헐뜯고 싸우는 정치판에서, 둘로 갈라진 진영 논리에 민생은 없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피가 나도록 싸워 권력을 쟁취하려 할까. 한때 진시황이 평생 불로초를 찾으며 영생을 꿈꾸었으나 결국 죽었듯 최고의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호령했던 권력자도 돌아갈 곳은 결국 몇 평도 안 되는 흙이다. 내가 가진 힘을 무엇을 위해 쓸 것인지 생각해 본다. 비록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아주 조그마한 힘일지라도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 나누면 어떨까.
사람 사는 세상의 가치를 지위가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잊어버리는 듯해서 아쉽기만 한 요즘이다.
[민병식]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시인
현) 한국시산책문인협회 회원
2019 강건문화뉴스 올해의 작가상
2020 코스미안뉴스 인문학칼럼 우수상
2022 전국 김삼의당 공모대전 시 부문 장원
2024 제2회 아주경제 보훈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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