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리던 봄비가 대지를 흠뻑 적시고 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지킴이' 생각이 난다. 지킴이는 시골에 있는 우리 집을 지키던 큰 구렁이였다. 녀석은 오늘처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모습을 드러냈다. 길이가 약 2미터 정도 되는 검은 구렁이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둥을 타고 마루에까지 올라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지게작대기를 들고 구렁이의 진행 방향을 틀어 주면서 "어진 짐승아 마루에서 내려가거라"라고 하셨다. 그러면 지킴이는 느릿느릿 마당으로 내려갔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구렁이를 본 적도 없을 것이고, 만약 본다고 해도 무섭고 징그러워 기겁할 것이다. 그러나 옛 어른들은 지킴이와 함께 살면서 오히려 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지킴이를 지역에 따라 '찌끼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집을 지키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구렁이도 여러 종류가 있다. 능구렁이도 있고 황구렁이도 있는데 지킴이는 보통 검은색의 '먹구렁이'로 불리는 놈이다. 이런 구렁이들은 독사와는 달리 물려도 독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지킴이는 집에 사람과 함께 살면서 쥐나 두더지와 같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을 잡아먹는다. 기르는 닭을 잡아가는 족제비처럼 날렵한 동물도 지킴이가 집을 지키고 있으면 접근을 하지 않았다.
옛 어른들은 이런 구렁이를 신성한 동물로 여겼다. 지킴이를 죽이면 집안이 망한다거나, 구렁이를 죽인 사람이 비명횡사했다는 설화가 많이 전해 온다. 심지어 해묵은 구렁이는 곧 용이되어 승천할 것으로 믿고 이무기라고 불렀다.
구렁이가 아닌 다른 뱀들은 인간으로부터 홀대를 받았다. 시골 아이들이 길을 가다 뱀을 만나면 돌멩이로 폭격하거나 나뭇가지로 타작을 해서 죽였다. 특히 똬리를 틀고 도망가지 않는 독사는 제일의 공격 목표였다. 살모사, 까치독사와 같은 독사는 물론이고 물뱀, 꽃뱀 이런 뱀들도 아이들을 만나면 살아남을 길이 없었다. 방언으로 '너불대'라고 불리는 꽃뱀은 그나마 걸음이 제일 빠른 뱀이라 재빨리 도망쳐 풀 속으로 숨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이런 잡뱀들과는 달리 구렁이는 평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행동도 느려 터졌다. 그래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한다"는 말이 생겼다. 능구렁이는 캄캄한 밤에 길바닥에 드러누워 죽은 척하고 있다가 사람이 밟아야 꿈틀댈 정도로 미련한 녀석이다. 그래서 속내를 알 수 없는 음흉한 사람을 가리켜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고 한다.
맑은 이슬을 받아먹고 산다는 뱀은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때로는 사악한 동물로도 묘사된다. 아담과 이브가 뱀의 꾐에 넘어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다는 이야기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제는 이런 뱀들도 점차 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환경오염으로 개체 수가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농약 살포도 그 원인 중의 하나다.
시간이 갈수록 봄비가 제법 세차게 내린다. 이렇게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면 지킴이는 깊숙이 숨어버린다. 이슬비나 부슬비가 내려야 어디선가 기어 나온다. 담을 타고 넘기도 하고 밥 짓는 불을 때는 부엌에도 슬쩍 들어오는 착한 녀석이 지킴이다. 이제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고향 집은 폐허가 되어간다. 오늘따라 어머니가 그리워지고 그렇게 어진 짐승이었던 지킴이가 문득 보고 싶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