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있다는 회자정리가 세상의 이치라면 우리는 어찌 살아야 할까. 생과 사, 좋은 일과 궂은일이, 영속되지 않고 다 지나가는 찰나라면 우리가 그 무엇 또는 누구에게 연연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미신을 보존한다. 믿어서라기보다 미신이 주는 이상야릇한 스릴 때문이라고 필립 개리슨은 그의 에세이집 ‘점복’에서 말한다. 우리는 민속신앙을 존중한다. 그대로 믿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집단적 반 의식적인 염원이다.
우리의 단조로운 일상생활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것이다. 우리 삶을 계획하기 위해 어떤 법칙과 규칙을 적용하든 말든 미신은 예측불허의 긴장 상태에서 발생하는 흥분, 짜릿짜릿, 조마조마,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해준다.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해준다.
믿음과 사실은 상반되는 것, 적어도 정반대로 어긋나게 맞서는 것이 아니고, 에둘러 상호 보완한다. 예측 가능성에 싫증 난 우리는 예측 불가능의 세계를 동경한다. 우리 믿음의 일면 조각들로부터 미루어 점쳐볼 수 있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한다. 한때 저 명왕성이 해왕성과 연관 관계를 맺듯 한 별의 궤도 또는 그 궤도의 어떤 불규칙성이 천문학자들에게 그들이 보지 못하는 다른 별들의 존재와 위치를 추측, 추리할 수 있게 하듯이. 나이를 먹을수록 온갖 민속신앙이 내 머릿골 속에 박히는 것 같다.
내 사고의 주위로 온전히 자리 잡으면서, 이 괴상망측한 고풍(古風)의 유령들이 인생과 예술 사이로 너울너울 춤추며 떠도는 것을 바라보노라면 나는 혼미한 황홀지경에 빠진다. 우리가 사실의 풍경화 속에 살고 있으나 그 상대화인 믿음의 세계로 끌리는 유혹을 피할 길이 없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밥도 먹지만 꿈도 먹고 사는 게 사람이기에 예술인과 더불어 요술인인 목사, 무당, 신부, 중, 점쟁이 종교인들도 밥 벌어 먹고살 수 있나 보다.
1980년대 나도 이런 점쟁이의 밥이 되어 본 일이 있다.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 거리를 지나다 호기심에서 타로점을 본 일이 있다. 어려서부터 별나게 호기심이 많은 데다 어떤 일이고 미리 판단하고 단정해버리지 않고,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또는 고정관념도 갖지 않으려고 애써온 까닭에서였으리라.
“당신이 원해 추구했더라면 그 어떤 명예나 권력도 잡고 재산도 크게 모았을 사람인데 당신은 그따위 것엔 전혀 상관없이 참사랑만을 찾아온 낭만주의자요 이상주의자야. 멀지 않은 장래에 당신이 평생토록 찾아온 당신 영혼의 짝을 만나게 될 것이야. 당신은 돈이 많지도 않고 없지도 않지만 언제나 당신 쓰고 싶은 만큼 쓰고 살 운명을 타고났어. 그리고 당신은 여행을 좋아하며 음악을 늘 즐겨 듣지. 게다가 당신은 당신이 보스가 되어야지 다른 사람 밑에서는 일 못 하는 사람이야.”
그 말도 그럴듯했다. 하기야 그 누군들 안 그러랴. 선택의 자유와 여유가 있다면야. 하지만 미신이든 신앙이든 믿음은 믿음이고, 환상이든 몽상이든 꿈은 꿈이다. 스스로의 과대평가가 어리석다면 그 반대로 과소평가는 그 더욱 어리석고 안 좋은 일 것인지 모르겠다. 미국의 정치가이며 과학자이고 문필가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그의 자서전에서 말한 것 같이 자만심을 극복하겠다고 겸손하다는 교만을 부리게 되어서는 안 될 테니까.
사람마다 다 제 잘난 멋과 맛에 산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만한 것 같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기 열 달 전부터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치열한 생존경쟁 끝에 엄마 뱃속에 수태된 것 아닌가. 누구나 자기 자신부터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남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이 대우주의 축소판인 소우주요, 내가 숨 쉬는 순간순간이 영원의 축소판인데 그 어찌 나 자신과 순간순간의 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수선화 피우는 낙으로 살아온 것 같다. 연못 속에 비친 제 모습에 반한 나머지 그 연못에 빠져 죽은 미소년이 그 연못가에 수선화로 피어났다는 전설 말이다. 봄에 제일 먼저 피는 꽃이 수선화라 하지 않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 코스모스가 가을 길가에 많이 피도록 부지런히 수선화부터 연못가에 많이 피워야겠다.
인류의 역사는 약육강식의 역사다. 흥하면 망하고 성하면 쇠하는 게 역사다. 역사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돌고 도며 끊임없이 변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원수처럼 싸웠던 시대가 있었지만, 또 하나가 되어 잘 살았던 시대도 있었다. 조선왕조 때는 당파싸움으로 국력을 소진하다가 일본의 침략으로 식민지가 되었고 해방 후에는 미국과 소련이 만든 냉전에 휘말리다가 한국전쟁을 겪어야만 했다. 남북으로 갈라진 동족에게 총칼을 겨누며 서로 미워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갈리는 현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언제까지 바라보아야 하는가. 미국, 일본, 중국, 소련의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친중하고 친일하고 친러하고 친미하면서 시대의 조류에 떠밀려 가는 일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우리 민족과 뿌리가 같다는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와 노예 생활을 한 흑인들 또한 인류역사상 큰 피해자들이다. 베트남전에 파병되어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참전용사들 역시 어두운 역사의 피해자들이다.
이런 질곡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없을까.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자연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해 온 서양이 만든 물질문명의 ‘원죄의식’과 ‘선민사상’에서 탈피하여 우리나라의 홍익인간이나 인내천 사상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면 질곡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강자와 약자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것은 홍익인간 정신뿐이다.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는 일이란 두루두루 골고루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상과 인식의 전환이 절실한 시대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일이 홍익인간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신앙처럼 받드는 진언에도 홍익인간의 사상이 들어 있다.
강물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따 먹지 않는다.
햇빛은 스스로를 위해 비추지 않고
꽃들은 스스로를 위해 향기를 내뿜지 않는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이다.
네가 행복할 때 네 삶은 좋다.
하지만 너 때문에 남들이 행복하면
그것이 훨씬 더 좋은 삶이다.
남을 위해 살지 않는 자는
삶을 살 자격이 없다.
우리의 본질은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이다. 강물처럼 나무처럼 사는 사람, 햇빛처럼 꽃처럼 사는 사람, 나의 행복보다 너의 행복을 위해 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코스미안이다. 코스미안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땅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하늘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