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출간된 ‘남성의 종말과 여성의 천지개벽’이란 책이 오늘의 시대상을 정확히 진단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지성 월간지 ‘애트랜틱’의 칼럼니스트인 한나 로진이 쓴 이 책은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성’이나 시몬 드 보봐르의 ‘제2의 성’ 그리고 나오미 울프의 ‘미의 신화’를 무색케 할 역사적인 저서로 지금까지 수천 년 지속되어온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권력 이동의 맥을 짚어 부계사회가 끝나고 모계사회가 도래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섹스는 세상살이를 흥미롭게 하는데 필요한 전부를 제공한다며 2004년에 나온 서적 ‘여성의 성과 진화론’의 저자 레오나드 쉬레인 박사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욕망의 부조화를 탐구해보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약 15만 년 전부터 인간 두뇌가 커지고 다른 동물들처럼 기는 대신 일어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우리 신체 구조가 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남자에겐 별문제가 안 되지만 여자에겐 큰 위험부담이 되었다고 한다.
임신 후 몸보다 머리가 큰 아이를 협소한 질을 통해 출산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이 생기게 되었고 따라서 여성은 배란주기에 섹스를 본능적으로 기피하게 되고 남성은 정반대로 더 굶주리게 되었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쉬레인 박사는 그의 첫 저서 ‘예술과 물리학’에서 예술이 언제나 과학에 앞선다며 피카소 같은 예술가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실마리를 풀어주었음을 그 한 예로 든다. 그다음으로 쓴 그의 두 번째 저서 ‘알파벳 대 여신’에서 저자는 더욱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를 둘러보라. 무엇이 제일 큰 문제인지 곧 알게 된다. 그것은 곧 배타적인 종교의 폐쇄성이란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한 권의 책 속에 일자일획의 오류도 없이 기록되었다고 사람들이 굳게 믿게 되자 인간은 이 ‘말씀’ 때문에 서로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뿌리에서 생긴 고대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나타나 ‘여신이란 없다’고 선언하자 문화가 부계사회로 바뀌면서 공격적으로 되어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종교 때문에 ‘사랑’을 빙자한 살육지변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문자가 서구문화에 끼친 엄청난 해독을 분석하면서 저자는 그 해독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절망하고 비탄만 할 일이 아니며 희망의 서광이 비치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최근에 와서 TV와 예술, 그림, 화상, 영상, 조각상 등 이미지의 폭발적인 파급으로 추방됐던 여신이 돌아오고 시각적으로 구전적으로 인류사회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편다.
지난 20세기의 대표적인 중국 문필가 임어당(1895-1976)이 지적했듯이 서양문명이 남성적이고 동양문화가 여성적이라면 평화와 사랑의 화합작용으로 생명을 만드는 동양의 음기가 전쟁과 폭력의 파괴행위로 목숨을 앗아가는 서양의 양기를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유치하고 상스러운 남성인류가 어서 사라지고 성숙하고 자비롭고 고상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운 여성인류가 부활하는 코스미안 시대를 열어보리라.
‘헤엄쳐라. 가라앉지 않으려면’
이 말은 우리 자신은 물론 자식들에게도 적용할 생존법칙이다. 2012년에 나온 ‘반(反)약골 : 무질서에서 찾을 수 있는 것들’은 뉴욕대 폴리테크닉 인스티튜트의 저명한 교수인 ‘나심 니콜라스 탈렙’의 저서다. 2007년에 나온 그의 베스트셀러 ‘흑조’의 속편으로 흑조는 전쟁이나 인터넷 등장과 같은 예측불허의 엄청난 사태를 의미한다. 이처럼 날로 증가하는 불확실성과 휘발성에서 야기되는 위험과 삶의 덧없음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저자는 강골이 되라고 한다. 온갖 스트레스, 시행착오와 변화 등에 허우적거리며 혼돈에 빠질 게 아니라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역이용하자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풀이하자면, 마음먹기에 따라 전화위복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탁상공론으로 배울 수 없고 실생활에서 삶을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인생이란 학교에서 꾸준한 인간수업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세상에 그림자 없는 빛이 없듯이 실망하지 않을 기대란 없을 테고 상처받지 않을 사랑도 없을 것이다. 사랑을 모르는 인형이, 고독을 모르는 동상이, 눈물을 모르는 조각이 되기보다, 거짓을 외면한 진실을 찾지 말고 자연을 외면한 진리를 찾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알뜰살뜰한 사람이 되는 것이 최상의 인간수업인 것이다. 우리말에 같은 이슬이라도 매미가 먹으면 노래가 되고 벌이 먹으면 꿀이 되나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 독도 약이 될 수 있지 않던가. 그러고 보면 세상에 버릴 게 없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조화가 아니면 무엇인가. 소년 시절 나는 코스모스가 좋았다. 이유도 없이 그저 좋았다. 그 청초한 모습과 하늘하늘 곱고 아리따운 자태 때문이었을까. 보기만 해도 좋고 생각만 해도 가슴 떨려 뜨겁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코스모스의 꽃말이 소녀의 순정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청년이 된 나는 코스모스를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다. 미치도록 죽도록 사랑했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남모르는 열병의 코스모스 상사병을 앓기 시작했다. 나는 코스모스 같은 소녀를 찾아 나섰다.
혼돈과 혼란의 격동기인 전쟁 속에서도 사랑과 평화의 상징 같은 코스모스를 찾아다녔다. 코스모스 같은 아가씨가 눈에 띄면 나는 원초적 그리움 솟구치는 나의 사랑을 고백했다. 타고난 태곳적 향수에 젖어 정처 없이 떠돌아 방황하던 시절, 사랑의 순례자가 된 나는 독선과 아집으로 화석화된 어른들의 카오스적 세계가 보기 싫었다. 그래서 순수한 사랑으로 코스모스 속에 새로 태어나고 싶었다.
현재 있는 것 전부, 과거에 있었던 것 전부, 미래에 있을 것 전부인 대우주를 반영하는 소우주가 인간이다. 나는 대우주인 코스모스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인생 순례자이며 우주나그네다. 저 우주의 주인이 바로 내 자신임을 깨닫는 것이 ‘코스미안’이다. 코스미안의 길에는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피어있다. 코스모스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우리는 모두 코스미안이다.
귀소본능이라 했던가. 사람도 우리 인생의 한 지점에서 귀향의 여로에 오른다. 삶을 돌이켜보면서 무엇이 되려고 한때 꿈을 꾸었는지 그리고 이제 무엇이 되었는지 생각할 시점이다. 이런 삶을 예술이란 거울에 비춰보자. 2002년 미국의 휴스톤 그랜드 오페라가 초연한 멕시코 작곡가 다니엘 카탄의 ‘플로렌시아 엔 엘 아마조나스’는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오페라에서 사랑은 삶과 죽음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원천이요, 원동력임을 강조한다.
남미음악 리듬에 맞춰 춤추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오페라는 인간의 감성적 본능에 호소하면서 다른 예술작품들처럼 너무도 인간적인 곤경과 궁지를 천착하면서, 변덕스러운 것부터 경이로운 경지까지 종횡무애(縱橫無碍) 섭렵한다. 이국적인 이 오페라는 남미문학의 주된 테마를 다룬다. 신비와 위험을 안고 감행하는 자아발견의 매혹적인 여정이다.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한 오페라가수로서의 오랜 경력 끝에 프리마돈나 플로렌시아는 금의환향이 아닌 익명의 신분으로 남미에 돌아온다. 그리고 옛날 고향에 두고 떠나온 애인 크리스토발에게로 돌아간다. 삶이 그 자체와 협상하고 죽음을 극복하듯 플로렌시아가 그녀의 마지막 아리아를 부를 때 그녀의 목소리는 하늘로 떠오르고 그녀의 노래는 투명한 날개가 된다.
나의 젊은 날도 필연인지 우연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인생여정이 있었다. 내가 직접 겪은 실화는 내 인생의 자양분처럼 늘 나를 그 시절로 되돌아가게 하는 귀소본능을 일으킨다. 젊은 시절, 군복무를 할 때 편지를 주고받으며 펜팔을 하던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나를 모델로 ‘푸른 제복의 사나이’라는 글을 써서 문단에 데뷔했다. 문인이 된 그 소녀와 사귀다가 그 유명한 여류작가였던 소녀 어머니의 반대로 안타깝게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긴 시간 소녀를 그리워했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유명한 소설가가 된 그녀를 25년 만에 뉴욕에서 기적처럼 다시 만나게 된다. 우리는 젊은 시절 이루지 못한 사랑을 장년이 되어 비로소 이룰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 나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나를 모델로 ‘꽃을 든 남자’라는 소설을 쓰게 된다. 그렇게 치명적인 사랑하면서 행복했던 우리는 얼마 못 가 옛날처럼 다시 또 헤어지게 되고 각자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인생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녀와 나는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두 번이나 운명처럼 만나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의 명복을 빌면서 짧은 글을 지어 그녀에게 마음으로 보냈다.
우화(羽化)
아, 코스모스 꽃잎 하나가 팔랑 한 마리 나비로 날아오르듯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의 한숨 한숨이 아지랑이처럼
아롱아롱 숨차게 피어올라 코스모스 하늘 무지개 되리.
아리아리 코스모스 무지개 되리!
이것이 바로 나비별곡 코스미안의 노래,
우리 다 함께 부를 코스미안 아리아이리!
난 매장보다는 화장을 선호하지만, 혹시라도 내 묘비명이 하나 세워진다면 이런 말이 새겨지길 희망한다.
코스모스를 사랑했다.
잃어버리고 평생토록
세상천지를 해매이다
어디에서나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발견하고
미소지으며 잠드노라
영원무궁한 코스모스
하늘엄마의 품속으로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