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오필선 시인의 『말보다 오래 머무는 말』은 언어 이전의 삶, 말 너머의 감정, 그리고 침묵 속에 머무는 존재를 향한 조용한 손짓이다. 가장 낮고 보잘것없는 자리에서 말을 가꾸고, 그 말로 생의 균열을 어루만지며, 마침내 우리가 머물렀던 계절의 이름을 불러주는 시편들은 고요하지만 단단한 서정의 힘을 보여준다.
<저자소개>
오필선
시인·수필가
* 저서
시집: “빛바랜 지난날도 그리움이다” 등
<목차>
시인의 말 4
제1부 : 말의 정원
조용한 숨결로 피어나는 것들 4
말의 정원을 가꾸며 12
용서의 시간 14
셋방살이 16
달의 등뼈 18
염주를 꿰는 시간 20
봄을 캐는 일 22
말보다 오래 머무는 말 23
밥보다 먼저 끓는 것들 25
괜찮아 이제는 28
풀잎처럼 사는 일 30
별똥별 32
늦은 시간은 없다 33
자존심이 팍 살던 날 34
틈 36
할머니의 감나무 37
제2부 : 가장 느린 도착
비가 내리면 42
느림은 나뭇잎 하나다 44
속도를 늦춘 바람 46
도착의 시점 47
고백 49
오래된 전화번호 50
길을 잃은 절벽 51
느림보가 건네는 안부 53
단단한 삶 56
마법의 노래 58
끝없이 부는 바람 59
봄이란 놈 60
내가 머문 자리 62
꽃이 져야 봄이 온다 63
보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것 65
제3부 : 처음은 언제나 비릿하다
아름다운 것들의 처음은 비릿하다 68
한 그릇의 위로 70
그대라는 이름 72
사리포구 73
아버지 75
염부의 눈물 78
소금꽃 79
고향의 봄 80
당신을 위한 겨울 81
다정함의 망설임 83
등불 하나 84
대부도 해솔길 85
비석거리의 외침 87
현정승집도 _청문당 90
방아머리 사랑 92
제4부 : 우리가 머문 계절
빛의 여백에 머물다 94
공명 96
젓가락 97
함성 99
사랑나무 101
가을 단풍 103
알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104
사랑1 105
사랑2 106
사랑3 107
사랑4 108
사랑5 109
코스모스 110
백합 111
목련 112
장미 113
라일락 114
서평 116
<책 속으로>
물기 머금은 흙냄새가
신작로 끝 오래된 버드나무를 깨우고
기억보다 먼저 봄이 도착하고서야
나는 한 계절 뒤 문지방을 넘었다
숨죽인 흙 속에서 돋아나는 연두빛이
한때 울컥했던 내 사춘기 같아
마루에 쌓인 바람을 걷어내며
아버지의 기침소리를 상상해 본다
“지금쯤 어머니는 고구마를 굽고 있었지”
봄은 그렇게
조용한 준비 끝에 도착하는 법인데
반겨주는 이 아무도 없어도
무심히 돌아올 수 있는
고향은 봄이다
-「고향은 봄이다」 전문
말은 씨앗에게 가지만
실은 오지 않는 누군가에게도 닿는다
느림은 그런 것이다
도착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한 해 먼저 마음을 보내는 일
가장 느린 안부는
물속에 잠겨 있다가
해가 바뀌는 어느 날
비로소 땅을 밀어올린다
그 손끝처럼 여린 싹을 보며
우리는 말이 많아진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거다
다만 너무 느려서
마침내 피워낸 것일 뿐
느림이란
말보다 오래 머무는 말이다
차마 끝맺지 못한 문장들의 뿌리
그 끝에서 꽃처럼 퍼지는 안부
-「말보다 오래 머무는 말」 중에서
나무는
누군가의 손길이 닿기 전
수없이 흔들려본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엔
천천히 흔들리기로 했다
산들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시간
그건 단지 거리 때문이 아니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해서다
속도를 늦춘 바람만이
나무의 그늘에 오래 머무는 것처럼
서두르지 않은 말이
오래 기억되는 것처럼
-「속도를 늦춘 바람」 전문
<출판사 서평>
『말보다 오래 머무는 말』은 말이 자라는 자리, 삶이 말로 피어나는 풍경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여기서 말은 이미 완성된 언어가 아니라, 상처에서 피어난 작은 씨앗이다.
삶이 조용히 지나가는 속도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존재의 틈을 언어로 매만지고 싶은 이들에게, 시인의 시집은 오랜 친구처럼 다가올 것이다. 『말보다 오래 머무는 말』은 문학이 어떻게 마음을 살피고, 기억을 끌어안으며, 계절을 건너는지를 보여주는 성숙하고 다정한 시의 정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