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60년대, 미국에 마를린 먼로가 있었다면 프랑스에는 브리짓 바르도가 있었다. 파격과 아름다움, 자유와 불안이 공존했던 그녀는 단지 한 시대의 섹시 심벌이 아니라, 세기의 유혹자라는 수식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성 중 한 명이었다.
브리짓 바르도는 네 번의 결혼과 100명이 넘는 남녀와의 열애로 주목받았고,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 하나로 한 도시가 관광지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깊은 허무와 네 번의 자살 시도가 있었고, 유혹은 그녀에게 생존의 방식이자 상처의 방패였다.
상류층 발레리나에서 유혹자의 길로
1934년 파리.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브리짓은 어릴 적부터 발레를 배웠고, 15세에 『엘르』 커버모델로 데뷔한다. 보수적인 프랑스 사회 속에서 비키니를 입고 대중 앞에 선 최초의 여배우가 되었고, 비틀즈와 여배우들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의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유혹의 시작은 16세 오디션에서 만난 영화감독 로제 바딤. 부모의 반대 속에서 자살시도까지 하며 그와 사랑에 빠졌고, 18세에 결혼한다. 이후 바딤이 감독한 영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는 전 세계적인 히트를 치며 브리짓 바르도를 국제적 스타이자 섹스 심벌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영화 속 쥴리엣처럼, 바르도는 곧 현실 속에서도 불륜과 열애, 자살시도를 반복하는 위험한 유혹자로 살아간다.
사랑보다 자유, 유혹보다 허무
첫 남편 바딤과 이혼 후, 바르도는 배우 장 루이 트랭티낭, 가수 길베르 베코, 사샤 디스텔과 잇따른 열애를 한다. 두 번째 결혼 상대인 배우 자크 샤리에와는 혼전 임신 상태로 결혼했지만, 엄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그녀는 아들을 두고 이혼한다.
당시 바르도는 아이를 돌보지 않았고, 아들 니콜라에게 거의 접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백한다:
“나는 아이를 낳았지만, 결코 엄마가 될 수 없었다.”
이후 브라질 음악가 밥 자구리와의 동거, 독일 갑부 군터 작스와의 장미 헬기 프러포즈와 결혼, 그리고 네 번째 남편 버나드 도르말과의 안정된 결혼까지. 그녀의 인생에는 영원한 사랑은 없었지만, 반복되는 열애와 탈출이 있었다.
그녀를 흔든 내면: 불안과 트라우마
브리짓 바르도의 유혹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권위적이고 학대에 가까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아버지에게 체벌을 받으며 친구조차 마음대로 사귈 수 없었다.
그런 유년기는 자유에 대한 강렬한 갈망을 낳았고, 결핍된 애정은 성적 해방과 파격으로 분출되었다. 자살시도는 모두 네 차례, 자의든 타의든 사랑보다 자유를 택했던 그녀의 방식이었다.
유혹자 유형: 세이렌, 절대적 관능의 화신
브리짓 바르도는 전형적인 세이렌형 유혹자였다. 파격적인 패션, 과감한 노출, 무표정 속에 감도는 섹시함, 하이힐 대신 맨발, 루스한 니트와 플랫슈즈, 거침없는 태도.
그녀의 스타일은 전 세계 여성이 모방했고, 남성들은 그녀 앞에서 무너졌다. 그녀는 비키니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도발적인 포즈와 이미지로 시대의 관능을 상징했다.
마를린 먼로가 백치미의 세이렌이었다면, 브리짓 바르도는 저돌적이고 반항적인 세이렌이었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유혹에서 생존으로
그녀는 1973년, 39세에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그 후 유방암 투병, 동물보호 운동, 논란이 많은 정치적 발언들로 다시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유혹자로서의 존재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브리짓 바르도는 단지 아름다워서 유혹한 것이 아니다. 상처를 숨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유혹자의 옷을 입었던 존재였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녀가 세기의 유혹자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