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개방의 명분, 현실은 붕괴된 농촌 경제
“값싼 수입 농산물은 소비자에게 이득일까?” 이 질문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 농업을 지배해 온 화두다.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확대와 농산물 관세 철폐는 대체로 ‘경제 전반의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포장됐다. 하지만 이 정책들이 농촌 경제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는지는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그 그림자의 크기와 색을 정확히 들여다봐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정부는 관세 철폐가 시장 효율성을 높이고, 소비자 선택권을 확장하며, 물가를 안정시킬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중소 농가들은 무자비한 가격 경쟁 속에 방어할 수단도 없이 무너졌다. 땅을 팔고, 비닐하우스를 철거하고,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수는 통계에 다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시장 조정'이 아니다. 대한민국 농촌이 수명을 다해가는 ‘사회적 해체’의 과정이다.
농촌은 단순히 식량을 생산하는 공간이 아니다. 문화와 공동체, 자연을 보존하는 복합적 생태계다. 관세 철폐가 가격만을 기준으로 농업의 가치를 평가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농업은 산업으로서, 지역 공동체로서, 국가 안보의 한 축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관세 철폐는 단순한 경제적 조치가 아니라, 수십 년간 누적된 사회 구조의 붕괴를 촉진하는 기폭제가 되어버렸다.

농업 보호의 실패, 무관세 수입의 무차별 공격
관세는 일종의 ‘시간’이었다. 자국 농업이 새로운 기술과 경영 구조를 도입해 국제 경쟁력을 키울 시간을 벌어주는 장치였다. 그러나 한국은 이 시간을 허무하게 흘려보냈다. 농업 구조조정은 지연됐고, 농업인 지원은 일회성에 그쳤으며, 정부의 대응은 수동적이었다. 그러는 사이 값싼 수입 농산물은 관세 장벽을 무너뜨리고 무차별적으로 시장을 장악했다.
예를 들어 쌀의 경우, 2014년 이후 관세화가 이루어졌지만, WTO 협상 조건에 따라 일정량의 저율관세 쌀이 해마다 쏟아져 들어왔다. 마늘, 양파, 고추, 심지어 계란까지 주요 작물이 무관세 수입으로 대체되고 있다. 수입 농산물은 유통 대기업과 대형마트를 통해 손쉽게 유통되지만, 국내 농산물은 여전히 유통 구조와 물류비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다.
특히 WTO 개도국 지위 포기로 인해 앞으로의 관세율 유지 가능성조차 희박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수입 확대와 농민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는 명백하다. 수입 농산물은 확대됐고, 농업인 보호는 실패했다. 정책은 구조적으로 모순적이다. ‘보호 없는 개방’은 경쟁이 아니라 파괴다.
통계로 본 한국 농업의 붕괴 시나리오
한국의 농가 수는 2000년대 초반 150만 가구에 달했지만, 2024년 현재 100만 가구 이하로 추락했다. 그중에서도 65세 이상 농가 비율이 45%를 넘는 상황에서 청년 농업인은 전체 농가의 2%도 채 되지 않는다. 농촌 고령화는 더 이상 미래의 일이 아니다. 현재 진행 중인 위기다.
또한 2010년대 중반 이후 수입 농산물 비중은 매년 꾸준히 증가해 2023년 기준 전체 식량 소비량의 75%가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자급률은 쌀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작물에서 20% 이하로 떨어졌다. 이러한 현실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한국 식량 안보의 붕괴를 의미한다.
농업인 1명이 감당하는 재배 면적과 물류 부담은 커졌지만, 판매가는 오르지 않았다. 도매시장 구조는 여전히 중간상인 중심이고, 유통 마진은 대기업이 가져간다. 이대로 가면 2030년에는 식량 자급률 10% 이하, 농촌 공동체의 절반 이상이 해체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리고 이는 추측이 아닌, 통계와 추세에 근거한 합리적인 경고다.
농업 관세의 재정의가 필요한 이유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농업 관세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한다. 관세는 단순히 국내 농산물을 보호하기 위한 ‘벽’이 아니다. 그것은 식량 안보, 농촌 유지, 공동체 보호라는 보다 큰 그림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시장 자유화가 절대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모든 분야가 시장 논리로만 평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은 CAP(공동농업정책)를 통해 농업을 단지 식량 생산이 아닌 생태 보호와 공동체 유지의 핵심 산업으로 보고 있다. 일본은 자국 농업이 국제 경쟁력이 없더라도 농촌 공동체 유지를 이유로 보조금과 높은 관세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왜 여전히 농업을 시장 논리로만 판단하는가?
관세는 절대적인 해결책이 아니지만, 최소한의 방어막이다. 이 방어막이 없으면 아무리 스마트팜이 도입되고, 청년 농업인이 육성돼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관세를 지키거나, 대체 수단(예: 보조금, 유통 개혁, 공공비축 확대 등)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자유무역'이라는 신화에 균열을 낼 시간
지금 우리는 한국 농업의 가장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자유무역과 개방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지만, 그 속도와 범위는 선택할 수 있다. 관세 철폐는 되돌릴 수 없는 정책이 아니라, 재조정이 가능한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다. 우리는 다시 묻고,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앞으로의 대한민국 농업은 관세 논의의 수준을 넘어, ‘지속 가능한 농촌의 비전’ 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관세는 그 비전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관세 철폐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그 사회에 농업이, 농업인이 설 자리는 있는가?
[칼럼-이택호 기사 제공]
칼럼니스트
수원대학교 교수, 경영학박사
(사)한국경영문화연구원 원장
좋은세상바라기 전문교수
농업경영교육 전문가
농정원 청창농 전문교수
농림축신식품부 인증컨설턴트
웰다잉교육지도사
안전교육지도사
변화와 혁신 및 리더의 역량강화 전문가
“죽기전에 더 늦기전에 꼭 해야 할 42가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