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제2차 당항포해전 진해선창의 위치 비정(比定)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 남단 인곡천과 태봉천이 만나는 간척지 일대

이전의 칼럼에서 제2차 당항포해전의 경과와 전략적 의의를 소개한 바 있다. 앞으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제2차 당항포해전의 전투가 벌어진 정확한 장소가 어디인지 순차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진해선창(鎭海船滄)의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노산 이은상은 1960년에 ‘이충무공전서’ 번역서를 출간하면서 제2차 당항포해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들의 위치에 관한 주석을 달았다. 이은상은 진해 선창을 창원군 진동면 진동리(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로, 읍전포를 진해면 고현리(鎭海面古縣里)로, 시구질포를 율구미포(栗仇味浦) 또는 창원군 구산면 시포리(柴浦里)로, 오리량을 창원군 구산면(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으로, 어선포를 통영군 용남면 어의포(於義浦)로 주석을 달았다.

 

진해면은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의 일제강점기 지명으로서 임진왜란 시기 진해와 전혀 다른 지역이다. 노산 이은상이 실수로 진동면 고현리를 진해면 고현리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율구미포(속칭 밤귀미)는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에 있는 지명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진해가 아닌 창원에 속했으며, 시포리는 조선시대 사료에서 전혀 찾을 수 없는 미상의 지명이다. 

 

창원군 구산면은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칠원현의 월경지(越境地-고을 경계 밖에 있는 특수 지역)였으므로 조선시대 진해와 다른 지역이다. 어의포는 지금의 통영시 용남면 어의리 어의도(於義島)를 말하는 듯한데, 어의도는 조선 초기에 어리도(於里島)라는 지명으로 불렸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이은상의 주석은 전반적으로 적지 않은 오류를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제2차 당항포해전 관련 연구 자료가 여럿 출간되었지만, 전투가 벌어진 지명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거나 이은상의 주석을 검토나 비판 없이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2차 당항포해전이 벌어진 지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답습되고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고자 한다.

 

지난번 칼럼에서 제2차 당항포해전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전투가 벌어진 지역의 지리적 환경을 설명하였다. 조선 수군이 제2차 당항포해전을 벌인 곳은 거제시 하청면 연구리 광이도(대광이도와 소광이도를 함께 부르는 지명) 주변의 속칭 ‘괭이바다’로서, 바깥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바닷길은 남쪽의 견내량과 동쪽의 구산현 앞바다 두 곳밖에 없다. 제2차 당항포해전 시기 통제사 이순신 휘하 조선 수군은 31척의 왜선이 괭이바다로 들어오자 바깥 바다로 나가는 두 곳의 바닷길을 막고, 왜선을 막다른 궁지로 몰아서 모두 불태웠다. 나는 이 작전을 천문과 지리 전략가인 이순신의 ‘괭이바다 해상 봉쇄작전’으로 명명한 바 있다. 아래 그림은 제2차 당항포해전의 전투 경과와 주변 지역을 보여주는 상황도이다.

 

제2차 당항포해전 상황도

 

위 지도를 살펴보면 조선 수군은 바깥 바다로 이어지는 바닷길 두 곳을 막은 다음에 왜선을 진해현(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전면·진북면)과 당항포 쪽으로 몰아서 소탕하였다. 이은상이 언급한 지명 중 진해면(창원시 진해구)과 율구미포(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는 조선 수군의 포위망 바깥에 있으므로 전혀 당시 전투 지역으로 볼 수 없는 곳이다. 이은상이 언급한 어의도(통영시 용남면 어의리) 또한 조방장 어영담 휘하 전선 30여 척이 공격하는 방향 반대쪽에 있고 조선수군 판옥선 20여 척이 견내량을 봉쇄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전투 지역으로 보기 어렵다. 이은상의 주석은 이렇게 오류가 많은 까닭으로 그 내용을 신뢰하기 어렵다. 제2차 당항포해전 관련 지명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제2차 당항포해전의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되었던 곳은, 조선 수군이 왜선을 궁지로 몰아넣은 진해현과 당항포 일대에서 찾는 것이 합당하다. 충무공 이순신이 제2차 당항포해전의 경과를 기록한 장계 「당항포파왜병장」에 기록된 여러 전투 지역 가운데 첫째로 살펴볼 곳은 진해 선창이다.

 

「당항포파왜병장」에 따르면 왜선 10척이 ‘진해 선창(鎭海船滄)’에서 나와 기슭을 따라가는 것을 조선 수군이 공격함으로써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진해는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북면·진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와는 전혀 다른 곳이다. 조선시대 진해는 1908년 창원부에 합쳐지면서 그 지명이 폐지되었다. 지금의 진해는 일제가 조선시대 웅천 지역에 군항 시설을 세우면서 붙인 지명이다.

 

조선시대 진해는 예로부터 어업이 근간이었던 작은 규모의 고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조선시대 지리지를 살펴보면 진해의 주요 생산 품목 가운데 수산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3대 어보(魚譜)의 하나로 꼽히는 김려(金鑢, 1766∼1821)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가 진해를 배경으로 집필된 사실도 이 고을의 자연환경을 잘 말해준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에 있는 ‘진해현 관아 및 객사유지(客舍遺址)’는 조선시대에 진해읍성 터였다. 조선 초기에 새롭게 정비되었던 진해읍성은 남쪽을 진동만을 통해 바다로 진·출입할 수 있고, 북쪽과 서쪽으로 각각 함안군과 고성현 등이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어촌 고을 진해의 읍성이 남쪽으로 곧바로 바다와 맞닿아 있으므로 진해 선창의 위치를 진동면 진동리라고 설명한 이은상의 주석은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사용된 ‘선창’이라는 용어의 용례와 의미를 살펴보면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조선시대의 조선업이나 선소를 다룬 역사학계의 연구 자료를 살펴보면, 보통 조선시대의 용어 ‘선창’을 ‘전선소(戰船所)’나 ‘선소(船所)’와 같은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은 설명이다. 얼마 전 조선시대 용어 ‘선소’와 ‘선창’에 관해 자세히 설명한 연구 자료(정현창·김병인, 「조선시대 ‘선소’와 ‘선창’의 용례와 개념」, ‘지방사와 지방문화’ 20-1, 2017)가 출간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선창’은 여러 한자로 표기되었으며, ‘선소’·‘전선소’·‘배다리(舟橋)’·‘선착장’·‘부두’·‘선실’·‘창고’·‘항구’ 등 다양한 의미를 지녔다.

 

다시 말하자면, ‘진해 선창’은 ‘선창’의 의미 해석에 따라 ‘진해 선창’의 의미가 달라지며, 그 위치도 바뀔 수 있다. 한 예를 들면 ‘진해 선창’의 ‘선창’을 ‘선소’로 해석하여 조선 후기 진해의 선소가 있던 마산합포구 진동면 고현리 선두 마을(조선시대 선두리)을 진해 선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만일 진해 선창의 위치를 역사학자들에게 문의한다면, 아마 대부분 앞의 견해와 비슷한 답변을 할 것이다.

 

‘진해 선창’의 ‘선창’이 ‘선착장’·‘부두’·‘창고’·‘항구’ 등으로 해석된다면 ‘진해 선창’은 진해읍성 연해에 있던 선착장이나 부두 등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진해 선창’의 ‘선창’이 ‘선소’로 해석된다면 ‘진해 선창’이 선두리 선소일 가능성을 검토해보아야 한다. 하지만 다행히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당포파왜병장」에 ‘진해 선창’을 언급한 또 다른 기록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진해 선창’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당포파왜병장」(1592년 6월 14일)

 

(6월) 5일 ≪중략≫ 서둘러 같은 포(당항포) 앞바다에 이르러 남쪽에서 진해(鎭海)를 바라보니 성(城) 밖의 몇 리 정도 되는 들판 가운데 무장한 군사(甲兵) 1,000여 기가 기치를 세우고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탐문하니 함안군수 유숭인이 군사 1,100기를 이끌고 적을 쫓아 이곳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중략≫ 녹도만호 정운이 사로잡은 동래(東萊)에 사는 사노(私奴) 억만은 올해 나이 13세로서 왜인처럼 머리를 깎았는데, 그를 심문하였더니 ‘≪중략≫ 이달 6월 5일 한 무리의 (왜선) 4척이 함께 진해 선창(鎭海船滄)에 정박하고 절반 이상의 인원이 성(城)으로 들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해성(鎭海城) 밖에서 수천의 무장한 군사(甲兵)가 고을(同縣)로 돌입하면서 병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기에, 성에 들어갔던 적이 크게 소리치며 급히 돌아와 배를 타고 노를 재촉하여 바다 가운데로 나아갔다. ≪중략≫’라고 하였습니다.

 

「당포파왜병장」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인 1592년에 벌어진 사천해전·당포해전·제1차 당항포해전·율포해전의 경과를 기록한 장계이다. 위 「당포파왜병장」의 기록에서 파란색 부분이 진해 선창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내용이다.

 

위 파란색 부분은 기록을 조금 더 명료하게 요약·정리하면, ‘1592년 6월 5일 일본군은 진해 선창에 왜선 4척을 정박하고 절반 이상의 인원이 진해성(진해읍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함안군수 유숭인이 이끄는 1,100기의 조선 기병이 진해 고을로 돌입하자 진해성에 들어갔던 일본군은 다시 진해 선창으로 급히 돌아와 배를 타고 바다로 달아났고, 조선 기병은 진해성 밖 들판에 진을 쳤다.’라는 내용이다.

 

진해읍성 주변 지형으로 보아 함안군수 유숭인이 이끌던 조선 기병은 진해현 서쪽 또는 북쪽에서 공격해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진해 선창의 후보지로 제시된 적이 있는 선두리(지금의 고현리 선두 마을)는 진해읍성과 직선거리로 약 2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선두리와 진해읍성 두 지역 사이에는 우산(牛山)이라는 큰 산이 있다. 조선 기병이 진해 고을로 돌입했을 때 일본군이 진해성(진해읍성)에서 빠져나와 기동력이 매우 빠른 조선 기병을 피해 거리가 먼 선두리까지 도보로 이동한 다음 배를 타고 달아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래 사진은 진해현 관아 및 객사유지(조선시대 진해읍성)와 고현리 선두 마을(조선시대 선두리) 연해 지역을 1967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이다. 그 일대의 지리적 환경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설명한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진해현 관아 및 객사유지와 고현리 선두 마을 지도자료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랫폼

 

위 「당포파왜병장」에 묘사된 조선 기병과 일본군의 전투 상황은 진해 선창이 선두리가 아니라 진해읍성과 인접한 연안에 있었음을 거의 명확히 입증한다. 또한 ‘진해 선창’은 ‘진해 선소’가 아니라 ‘진해 읍치의 선착장’ 또는 ‘진해 읍치의 부두’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

 

조선시대 진해읍성 터와 인접한 지금의 진동면 진동리 최남단(인곡천과 태봉천이 합쳐지는 지역)은 간척사업 때문에 주변 지역의 지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과거에는 선박이 드나들면서 정박했던 곳이다. 아래의 1967년 항공사진을 보면 조선시대 진해 선창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자료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국토정보플랫폼 1967년 항공사진

 

본 칼럼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의 ‘동방학지’ 제210집(2025년 출간)에 수록된 논문 「제2차 당항포해전지의 위치 고찰」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이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https://myisoonsinxsz.zaemit.com/

 

작성 2025.08.04 11:48 수정 2025.08.0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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