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청준(1939-) 소설가는 전라남도 장흥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사상계' 신인 작품 모집에 단편소설 '퇴원(退院)'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이후 단편 '임부(姙婦)', '줄', '굴레' 등을 발표하여 작가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주요 작품으로 '이어도', '눈길' 등이 있으며, 창작집으로 '당신들의 천국', '서편제' 등 중·장편집이 있다.
여기 가면을 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한 남자가 있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불리던 명식, 중학교 때는 백일장에서 신통한 문체로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했고, S대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한 후 최연소로 합격하여 법관이 되었다. 결혼하여 아내 ‘지연’과 살고 있는 ‘명식’에게는 밤마다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이상한 습관이 생긴다. 이웃에 소문이 나기 시작해 명식이 딴 얼굴로 대문을 나서는 걸 본 사람도 있고, 어느 낯선 사내가 명식의 집으로 당당히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명식은 가면을 써야 위안을 받고 그의 밤 외출은 날이 갈수록 잦아진다. 그런 명숙은 처음엔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익숙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명식은 퇴근 후 집에 들어올 때마다 피곤함이 역력했고 의기소침했다. 명식의 변장은 외출 때 뿐만이 아니었고, 2층 서재에 틀어박혀 있을 때도 변장을 하는 듯했다. 지연은 딱 한 번 명식의 변장을 본 날은 한 번 뿐이었지만, 점점 명식을 이해하게 된다.
2층 서재에서 가면을 쓰고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는 명식의 모습에서 휴식과 위안을 받는다는 느낌이 든 후부터는 명식의 가면을 쓴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명식이 외출을 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면 오히려 자신이 일부러 침실에 들어가 명식의 은밀히 외출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그러면 명식은 어김없이 외출을 하고 퇴근 때의 피곤기를 말끔히 씻고 돌아온다.
물론 명식이 돌아올 때도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조치도 빼놓지 않는다. 그런 날 밤이면 명식은 어둠 속에서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와 한층 다정해 지고 활력에 찬 잠자리를 갖는다. 지연은 어느새 명식의 가면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명식은 점점 가면을 통해서 휴식을 느끼지 못하고 피로감만 쌓이는 날이 늘어간다.
명식이 오랜만의 밤 외출에서 돌아와 소리 없이 2층으로 올라간 다음이었다. 지연은 물론 그녀의 침대 속에서 명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계단을 내려오는 기척이 없었다. 지연은 불쑥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술이 너무 지나쳤나 싶기도 했고, 그런 일이 처음이라 다른 심상찮은 변고가 생기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그녀는 기다리다 못해 명식을 살피고 와야 한다고 생각해 2층 계단을 올라섰다. 기다리고 있기나 했던 듯 문을 열기도 전에 명식의 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술이 취해 있기는커녕 너무도 말짱하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지연은 쑥스러움도 잊고 끌리듯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명식은 불을 켜지 않은 채 창문 근처의 어둠속에 조용히 파묻혀 있었다.
모습은 잘 보이지 않은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다 가라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지연은 명식의 그 음성으로 그가 지금 그녀는 보지도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내보낸 채, 지연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깊은 갈망에 젖고 있다는 것을 어슴푸레 느끼고 결국 그냥 방에서 나온다. 명식은 그날 밤 끝내 2층 나무계단을 내려오지 않았다. 지연은 2층에 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망설인다. 2층에서 드르륵 창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지연은 정원으로 나가 2층을 보니 그곳에는 가발과 콧수염을 아직 떼지 않는 듯한 명식의 모습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정원에는 지연의 방 유리창 아래쪽 정원에 명식의 몸뚱이가 싸늘하게 식어 누워 있었다.
작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산다. 직장에서 모임에서 심지어 온라인상에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도 없고 자신의 본성을 모두 표현할 수도 없다. 결국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삶을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환경일 수도 있고 내 마음과는 다른 세상의 악함 일수도 있으며, 결국 자신의 본능적 자아의 상실하고 위로하려고 하는 행동이 가면을 쓰고 변장하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사회는 이중의 인격을 나타낸다. 자신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또 다른 나로 살아가야 하는 모습이 아니면 사회에서 생존을 위협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지 않고는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없는 세상일까.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정글보다 살아가기가 더 무서운 세상, 작품은 가면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말해준다.
[민병식]
에세이스트, 칼럼니스트, 시인
현) 한국시산책문인협회 회원
2019 강건문화뉴스 올해의 작가상
2020 코스미안뉴스 인문학칼럼 우수상
2022 전국 김삼의당 공모대전 시 부문 장원
2024 제2회 아주경제 보훈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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