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칼럼] 왜교성 전투 시기 명나라 전투선 피해 규모

윤헌식

왜교성 전투는 정유재란 시기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전라도 순천에서 1598년 9월 20일 ~ 1598년 10월 7일 벌인 전투이다. 조선과 명나라가 육상 3로군과 수로군을 동시에 진격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는 전략인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 왜교성 전투가 이루어지게 된 배경이다.

 

왜교성 전투 직후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퇴로를 마련하기 위해 남해와 부산 등지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많은 왜선이 왜교성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남해 노량에서 조명연합수군과 큰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노량해전이다. 이 때문에 왜교성 전투와 노량해전은 군사 전략의 관점에서 서로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전투이다.

 

왜교성은 지금의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있는 순천왜성을 말한다. 지금까지 그 성곽이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으며, 꽤 높은 구릉 위에 지어져서 그 위에 오르면 광양만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현재 광양만과 왜교성 일대는 간척사업이 상당히 진행되어 주변 지형이 많이 변했지만, 예전에는 주변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순천왜성 - 자료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왜교(倭橋)'의 지명은 임진왜란 시기에 생긴 것이 아니라, 고려말 왜구침략기에 왜인의 체류 또는 거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왜교'는 '예교(曳橋)'로도 불리는데, 『세종실록지리지』의 「순천도호부」에도 '예교포(曳橋浦)'라는 지명이 나타나므로 '왜교'나 '예교'의 지명은 최소한 조선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왜교성 전투는 비교적 관련 사료가 많은 전투이다. 아래는 그 해당 사료이다.

 

『선조실록』

이순신, 『난중일기』

조경남, 『난중잡록』

진경문, 「예교진병일록」(진경문의 문집 『섬호집』에 수록됨)

『우도궁고려귀진물어(宇都宮高麗歸陣物語)』(『우츠노미야 고려귀진물어』)

 

 

위 사료 목록 가운데 『난중잡록』의 제목을 보고 웃으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임진왜란 사료를 언급하다 보면, 『난중잡록』은 소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경남이 왜교성 전투에 직접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남원의 서기로 일했던 조경남은 많은 행정 문서와 각종 문헌을 활용하여 『난중잡록』을 저술하였다. 그런데 왜교성 전투에 관한 내용은 그가 직접 참전하여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난중잡록』 내의 다른 내용보다 더욱 가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말할 것도 없고, 진경문(陳景文, 1561~1642년) 또한 그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경험한 바를 「예교진병일록」이라는 일기 형식의 글로 기록하였는데, 이 글은 후일 그의 문집 『섬호집』에 수록되었다. 『우도궁고려귀진물어』는 왜교성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 장수 우츠노미야 구니츠나(宇都宮國綱)가 쓴 군기물이다. 즉, 위에 나열한 왜교성 전투 관련 사료는 대부분 이 전투에 직접 참전한 인물들이 자신이 직접 겪은 바를 적은 내용을 담고 있다. 참고로 『우도궁고려귀진물어』는 우리나라에서 이를 번역하여 소개한 연구 자료(『역사추적 임진왜란』, 「일본군 기록으로 본 순천 왜교성 전투」)가 있으므로 그 내용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왜교성 전투에 관한 연구 자료로는 『정유재란과 왜교성전투』(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2014)가 대표적이다. 여러 학자의 왜교성 전투 관련 논문을 책으로 엮은 것이므로 내용의 수준이 높다. 혹시 왜교성 전투를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이 책을 참조하시기를 권한다.

 

왜교성 전투를 자세히 다루기에는 내용이 매우 방대하므로 이글에서는 한가지 단편적인 것만 살펴보려고 한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왜교성 전투 시기 명나라 전투선의 피해 규모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의 정확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8년 10월 3일

 

(명나라) 도독(진린)이 유 제독(유정)의 밀서에 따라 막 어두워질 무렵 싸우러 나가서 밤 3경(밤 11~1시)까지 공격하다가 사선 19척, 호선 20여 척이 불탔다.

 

[원문] 都督因刘提之密書 初昏進戰 三更至搏擊 沙船十九隻唬船二十餘隻被焚.

 

위 기록은 명나라 전투선인 사선과 호선의 피해에 관해 서술하였다. 그 피해의 총규모는 대략 39척에 이른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이와 다르게 나타나 있다.

 

『선조실록』 권105, 선조31년-1598년 10월 10일 임술 5번째 기사

 

도원수 권율이 급히 계문을 올렸다.

 

"(10월) 3일 밤에 수군이 조수(潮水)를 타고 진격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왜적을 살상하였습니다. 명나라 군사는 치열하게 싸우느라 조수가 빠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명나라 선박 23척이 포구 얕은 곳에 걸렸는데, 왜적들이 불을 질러 죽거나 잡혀간 명나라 군사가 매우 많았습니다. <<중략>>  우리나라 배 7척도 또한 얕은 곳에 걸렸는데, 다음날 수군이 일찍 조수를 타고 와 구원하였으므로 돌아와 정박하였습니다."

 

위 기록에 따르면, 도원수 권율은 조정에 명나라 전투선의 피해를 23척으로 보고하였다. 이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권율이 명나라 군의 입장(체면)을 고려하여 일부러 피해를 줄여서 보고한 느낌이 든다. 『난중잡록』 또한 명나라 전투선의 피해에 관해 기록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조경남, 『난중잡록』 권3, 무술년 10월 3일/4일

 

적병이 진흙 속으로 마구 들어와 명나라 선박을 포위하고 기어올라 마구 죽이니, 명군이 힘이 다하여 마침내 스스로 그 배를 불태우니 모두 43척이었다. <<중략>>  우리나라 배 3척도 그 가운데 있었으나 선체가 높고 견고하며 활쏘기를 비 오듯 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조수가 밀려들어서야 나왔다.

 

『난중잡록』은 명나라 전투선의 피해를 43척으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난중일기』에 기록된 39척과 비슷한 규모이다. 게다가 『선조실록』에 실린 도원수 권율의 보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명나라 군의 입장을 고려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난중잡록』과 『난중일기』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일본전사 조선역』은 명나라 전투선의 피해를 사선 19척, 호선 24척으로 서술하였다. 일본군의 전공을 부각할 목적으로 『난중일기』와 『난중잡록』의 기록을 임의로 짜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측 기록인 『우도궁고려귀진물어』에도 명나라 전투선의 피해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일본군은 명나라 선박 32척을 소각하고, 7척을 포획하였다. 그 규모는 총 39척으로서 『난중일기』에 언급된 규모(사선 19척, 호선 20여 척)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려우므로 이 숫자가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난중잡록』은 우리나라 배 3척이 명나라 선박과 함께 얕은 곳에 걸려 있다가 나중에 나왔다고 기록하였는데, 『선조실록』에 수록된 도원수 권율의 계문에는 7척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는 「예교진병일록」의 기록을 통해 해결될 수 있을 듯하다. 「예교진병일록」의 기록은 당시 얕은 곳에 걸린 우리나라 배를 3척으로 기록하면서 이를 보성군수, 영등포, 평산포의 배라고 명시하였다. 기록이 상당히 구체적인 점을 감안하면 「예교진병일록」의 내용이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이 부분은 도원수 권율이 조선 수군이 명나라 수군과 공동 작전을 성실히 수행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수군 선박의 규모를 부풀려 보고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예교진병일록」은 보성군수, 영등포, 평산포 가운데 영등포를 '求登(구등)'으로 표기하였는데, 조선 수군 소속 가운데 '구등'이라는 곳은 없으므로 '求登(구등)'과 한자 모양이 매우 유사한 '永登(영등)'이 본래 표기일 것이다. 「예교진병일록」이 수록된 『섬호집』이 활자본으로 출간되면서 '永登'을 '求登'으로 잘못 본 듯하다.

 

참고로 『우도궁고려귀진물어』에 관한 우리나라 번역 내용은 연구 자료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다. 옛 일본 문헌 번역은 일본 학자들조차 애를 먹는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라고 하므로 이러한 까닭으로 번역 내용에 차이가 생긴 것 같다. 『우도궁고려귀진물어』에 기록된 명나라 선투선의 피해 규모를 39척이 아닌 32척으로 번역한 연구 자료도 있음을 밝힌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조경남(趙慶男), 『난중잡록(亂中雜錄)』

『섬호집(剡湖集)』, 「예교진병일록(曳橋進兵日錄)」, 2016, 국립광주박물관

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정유재란과 왜교성전투』, 2014, 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윤인식, 『역사추적 임진왜란』, 2013, 북랩

조원래, 「정유재란과 순천왜교성론 재검토」, 『문화사학』 제27호, 2007, 한국문화사학회

김경태, 「일본군 기록으로 본 순천 왜교성 전투 -『宇都宮高麗歸陣物語』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삼국의 사료를 통해 본 임

 『임진왜란』, 2022,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일본전사 조선역(日本戰史朝鮮役)』, 「본편(本編)」, 1924, 일본참모본부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5.08.08 09:58 수정 2025.08.0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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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