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 칼럼에서는 제2차 당항포해전 전투 지역 가운데 읍전포(읍전개)와 시구질포(섶굿개)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이번 칼럼에서는 제2차 당항포해전과 관련이 있는 지역인 오리량(吾里粱)의 위치를 살펴본다.
제2차 당항포해전의 경과를 기록한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당항포파왜병장」에 따르면, 1594년 3월 3일 2시경 고성의 벽방(지금의 고성군 벽방산)에서 망을 보던 장수 제한국이 통제사 이순신에게 급보를 보내어 “3월 3일 날이 밝을 무렵 왜의 대선 10척, 중선 14척, 소선 7척이 영등포(지금의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구영 마을)에서 출발하여 21척은 고성땅 당항포로, 7척은 진해땅 오리량(吾里梁)으로, 3척은 저도(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 저도)로 향했다.”라고 보고하였다.
‘난중일기’ 1594년 3월 3일에도 고성의 벽방에서 도착한 급보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내용에는 오리량의 지명이 ‘五里梁’으로 표기되어 있다. ‘吾里梁’과 ‘五里梁’은 비록 한자 표기는 다르지만, 우리말 구음이 같고 「당항포파왜병장」과 ‘난중일기’ 두 기록의 날짜와 내용이 일치하므로 같은 곳을 가리키는 지명임이 틀림없다.
한자 ‘梁(량)’은 바다의 지명에 쓰이면 선박이 지나다니는 바닷길인 ‘해협’의 의미를 지닌다. 예를 들면 한산도대첩의 배경이 된 ‘견내량(見乃梁-경남 통영시와 거제시 사이 해협)’과 명량해전이 일어난 장소인 ‘명량(鳴梁-전남 진도군과 해남군 사이 해협)’은 유명한 ‘梁’ 지명 사례이다.
「당항포파왜병장」은 오리량을 ‘진해땅(鎭海境)’이라고 기록하였데, 이는 오리량의 위치를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진해에 해당하는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전면·진북면 해안가에서 비슷한 지명이 발견되지 않아 오리량의 위치는 아직 미상으로 남아있었다.
이은상은 ‘이충무공전서’ 번역서를 출간하면서 오리량의 위치를 창원군(지금의 창원시 옛 지명) 구산면(지금의 마산합포구 구산면)이라고 하였지만, 구산면은 조선시대에는 칠원현(지금의 경남 함안군 칠원읍)의 월경지(越境地: 소속 고을 경계 밖에 있던 특수 지역)였던 구산현(龜山縣)에 해당하는 곳이다. 즉, 「당항포파왜병장」에 진해땅이라고 기록된 오리량은 구산현과는 소속 고을이 다르므로 이은상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조선시대 진해현은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전면·진북면에 해당하는데, 이 가운데 진동면과 진전면 두 개 면이 바다와 인접해 있다. 진동면·진전면 연해 지역은 그 해안선이 직선거리로 약 10km 내외에 불과한 그리 넓지 않은 곳이다. 이 연해 지역에서 ‘량(梁)’으로 불릴만한 곳을 찾아보면,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저도 옆 해협과 당항포 포구이다. 사실 이 두 해협은 종종 오리량의 후보지로 언급되던 곳이기도 하다.

저도(지금의 구산면 구복리 저도)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시대에 칠원현의 월경지였던 구산현에 속했던 곳이므로 오리량과 관련이 없다. 당항포 포구는 조선시대에 북쪽 육지는 진해현이었고 남쪽 육지는 고성현이었으므로, 「당항포파왜병장」에 진해땅이라고 기록된 오리량과 같은 곳으로 단정을 짓기 어려운 점이 있다. 게다가 「당항포파왜병장」에는 ‘당항포 포구(唐項浦浦口)’라는 지명이 등장하므로 이곳을 오리량으로 보기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저도 옆 해협과 당항포 포구를 제외하면, 진동면·진전면 연해 부근에서 ‘량(梁)’으로 보이는 곳을 찾기 어려운데 과연 오리량은 어디를 가리키는 지명일까?
우리는 어떤 지명이나 지역을 찾을 때 보통 지도를 활용한다. 현대 사회는 디지털 지도가 놀라운 수준으로 발달하여 지명이나 지역을 검색하기가 아주 편리하다. 그런데 지도는 축척에 의해 실제 거리를 축소하여 지면에 표시하기 때문에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느끼는 바가 다르다. 이는 지도의 축척 때문에 발생하는 인지의 문제이다. 진동면·진전면 연해 지역을 실제 현장에서 답사해보면, 지도로는 찾기 어려웠던 해협이 한 곳 발견된다. 진동면 요장리 바다와 가까운 섬인 수우도·소수우도 옆 해협이 바로 그곳이다.

수우도·소수우도와 육지 사이의 바다는 길이 약 800m, 너비 150∼500m 정도에 이르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해협이다. 수우도와 소수우도 사이는 깊이가 얕고 폭이 매우 좁아서, 썰물 때에는 바닷길이 열려 두 섬을 걸어서 오갈 수도 있다. 수우도·소수우도 옆 해협은 그 작은 규모로 인하여 지도로 보면 이곳이 해협이라는 점을 쉽게 간과하게 된다. 이 해협은 위에서 언급한 당항만 입구를 제외하면 진동면·진전면 연해 지역(조선시대 진해현 연해 지역)에서 ‘량(梁)’으로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수우도·소수우도 옆 해협은 이곳이 오리량임을 방증할 수 있는 사료도 존재한다. 조선시대 지도인 ‘1872년지방지도’의 「진해현지도」가 그것이다.

위 지도 아래쪽을 살펴보면 진해 읍치 남쪽 바다에 ‘대수우도(大水牛島)’라는 섬이 있는데, 이는 지금의 수우도·소수우도 중 수우도를 그려놓은 것이다. 이 대수우도에는 ‘읍오리(邑五里)’라는 표기가 있는데, ‘읍치로부터 5리 거리에 있다’라는 의미이다. 진해 읍치로부터 수우도·소수우도 옆 해협에 이르는 실제 거리를 재보면, 직선거리로 대략 5리(약 2km)를 조금 넘는다. 즉, 수우도·소수우도 옆 해협은 ‘오리량(五里梁)’이라는 지명과 잘 어울리는 곳이다. 이를 통해 ‘오리량(五里梁)’의 한자 표기가 지명의 연원이 반영된 것임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진해현의 읍지인 ‘진해현읍지’·'경상남도진해군읍지'의 방리(坊里)조(자료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를 살펴보면 수우도·소수우도 옆 해협과 인접한 주도리(지금의 요장리 주도 마을)를 ‘관문으로부터 오리(自官門五里)’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위 「진해현지도」에 나타난 ‘읍오리(邑五里)’와 비슷한 기록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수우도·소수우도 옆 해협의 지리적 특징과 「진해현지도」의 ‘읍오리(邑五里)’ 표기와 ‘진해현읍지’·'경상남도진해군읍지'의 ‘관문으로부터 오리(自官門五里)’ 표기를 종합해 보면, 지명 ‘오리량(五里梁)’은 수우도·소수우도 옆 해협으로 비정(比定)할 수 있다. 「당항포파왜병장」은 오리량을 ‘吾里梁’으로 표기했는데, 아마도 당시 현지 사람들이 부르던 지명을 임의의 한자로 가차(假借)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비해 ‘난중일기’는 오리량을 ‘五里梁’으로 표기했는데, 이것이 본래 지명일 것이다.
- 본 칼럼은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의 ‘동방학지’ 제210집(2025년 출간)에 수록된 논문 「제2차 당항포해전지의 위치 고찰」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이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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