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칼럼] 시간의 점들

홍영수

필자의 고향은 해남 땅끝이다. 지금도 고향에 내려가서 가끔 볼 수 있는, 특히 가을에, 육지의 최남단인 땅끝에서 오직 도보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된다. 여러 명이 아닌, 혼자 아님, 아빠와 아들 등, 한두 명이 땅끝에서 출발한다. 최종 도착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걷는 모습에서 떠오르는 시구가 워즈워스의 “ 나는 계속 걸어갔다 / 그때는 축복에 휩싸여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서곡> 이다. 그들이 땅끝에서부터 걷는 길 위에서 수없이 마주친 자연 풍경과 마주치며 행복했던 순간순간의 점들이 함축되어 삶에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영국 출신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1770~1850))는 흔히 자연주의 시인이라고 불린다. 스무 살에 알프스 여행하면서 그때 보았던 자연 풍경이 평생 그가 말했던 ‘시간의 점’이라는 것이 남아서 자신에게 활력소가 되어 주었고 가슴속 깊이 커다란 힘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워즈워스가 말한 ‘시간의 점’은 깊은 사유를 하게 한다. 그것은 여행하는 동안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면서 오감을 통해 느꼈던 것들을 맘속 깊이 안고 돌아와 기억이라는 저장 창고에 보관해 놓아 언제든 삶을 새롭게 재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필자도 ‘시간의 점’이라는 시 구절을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난관에 부딪혀 주저앉고 싶었을 때, 용기를 잃고 절망의 늪에 빠졌을 때, 힘들고 괴롭고 외로움에 좌절했을 때 살아갈 힘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함께 해 주었던 가족들과 친구들과 그리고 항상 응원해 줬던 가까운 주변인들이었다. 그들과 함께했던 경험들이 나에게는 ‘시간의 점’이었다. 지금도 살아가면서 어려운 환경과 길을 잃고 방황할 때면 가슴 깊이 간직한 응축된 ‘시간의 점’들을 들춰내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렇다고 시간의 점(a spot of time)이 마냥 긍정적일 수는 없다. 실패와 좌절을 겪었던 시간의 점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기억 밑자리에 지워지지 않고 남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살고 살아오면서 무수히 만났던 사람들과 또는 사는 만큼 읽었던 책들에서 내 마음과 몸에 생긴 시간의 점들에 의해서 사유의 깊이와 너비, 철학과 사상의 밀도는 높아질 것이다. 이처럼 ‘시간의 점’은 내 안의 기억이라는 저수지에 가둬진 삶의 커다란 질량과 부피만큼, 그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재료가 되고 힘이 된 것이다.

 

1790년 윌리엄 워즈워스는 어느 가을날 알프스를 도보 여행했다고 한다. 그때 누이에게 보낸 편지 내용은 이렇다 “이 수많은 풍경들이 내 마음 앞에서 둥둥 떠다니는 지금, 이 순간 내 평생 단 하루도 이 이미지들로부터 행복을 얻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큰 기쁨이 밀려온다. 이러한 자연 속의 경험을 "시간의 점(spot)"이라 했다.

 

우리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이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때는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쓰러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윌리엄 워즈워스 <서곡> 일부

 

기억은 몸에 각인된 각양각색의 체험적 얼룩과 무늬다. 워즈워스는 자연을 탐색하고 관찰하면서 보고 느꼈던 순간들이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유의미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자연과 사람, 사물 등과의 맺는 관계망에는 다양한 경험과 체험 등등이 망의 매듭으로 얼룩져 있다. 

 

지금도 나는 시간의 점을 만들어 쌓고 또 쌓고 있다. 이유는 함께 했던 내 주변의 좋은 사람들과, 그들과의 관계라는 그물망엔 나 또한 망의 한 매듭이 되어 오직 혼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혹한 겨울이 닥쳐와도 난, 가슴이라는 호주머니에 깊이 넣어두었던 시간의 점들을 꺼내보면서 폭풍 한설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점’이야말로 작가와 시인에게는 창작의 근원적 재료가 아닐까?,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그 어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작성 2025.08.11 11:43 수정 2025.08.1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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