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은 오래도록 한국 사회가 스스로를 설명하기 위해 호출해 온 가장 강력한 국가적 표상이었다. 교과서, 기념사업, 국가주의적 행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현된 그는 ‘국민 만들기’의 기호로 굳어지며 어느 순간 실제 삶의 자리에서 분리된 추상적 영웅으로 변모했다.
그 과정에서 이순신이 전쟁을 치렀던 구체적 장소, 그곳에서 삶을 이어온 사람들의 감정 구조와 상흔, 지역의 생활세계는 교육 속에서 거의 호명되지 않았다. 영웅은 남았으나 영웅이 발 디디고 싸웠던 장소와 공동체는 지워졌다. 이순신교육이 국가적 정체성을 재생산하는 장치로 기능해온 결과, 오히려 시민이 스스로 의미를 구성하고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은 제한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역설을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충분히 성찰하지 못했다.
거제 이순신학교 제1기 아카데미의 등장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거제이순신학교는 중앙의 이념을 지방으로 하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거제라는 장소가 스스로의 언어와 정서로 이순신을 번역해 내는 과정이었다. 강의실을 무상 제공한 지역 공기업, 도서 기증과 재능 기부로 이루어진 시민 참여, 전통춤과 승전무, 성악과 뮤페라가 함께한 문화예술행사, 그리고 29명의 시민이 ‘작은 이순신’으로 성장해 간 시간들. 이 모든 것은 지역 공동체가 이순신정신을 새롭게 호명하는 하나의 문화적 실험이자 실천이었다. 이곳에서 되살아난 이순신정신은 더 이상 국가주의적 기호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탱하는 윤리적 감각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예술의 개입이다. 강의가 담아내지 못하는 감정의 결, 역사적 공감의 떨림을 전통춤과 노래, 뮤페라 공연이 자연스럽게 이끌어냈다. 지역의 몸짓과 목소리로 재현된 예술은 이순신정신을 ‘지식’이 아니라 ‘감응’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예술은 건조한 역사교육의 틀을 넘어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공동체의 감정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지역 예술생태계와 인문학이 한 자리에서 호흡할 때, 교육은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지역의 문화를 재구성하는 살아 있는 사건이 된다.
강사 양성과정을 수료한 29명의 시민 역시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이들은 영웅을 모방하는 존재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 안에서 시민윤리를 실천하는 사람들, 곧 ‘작은 이순신’들이다. 이들의 리더십은 일상의 자리에서 공동체를 보듬고 책임을 나누는 태도에서 드러났다. 영웅에 대한 추앙을 넘어 시민 스스로 윤리적 주체가 되는 새로운 시민상(市民像)의 출현이다.
이러한 흐름은 이순신교육이 어디에 뿌리내려야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묻는다. 이순신의 전투는 언제나 바다와 마을, 민중의 삶 한복판에서 벌어졌지만 교육은 오랫동안 이 사실을 외면해왔다. 지역의 풍경, 기억의 지층, 주민들의 감정은 이순신 이해의 중요한 맥락임에도 국가가
표준화한 서사는 이를 주변부로 밀어냈다. 거제의 실험은 바로 이 잊힌 장소성을 회복하는 움직임이다. 지역이 스스로 교육을 설계하고, 지역민이 교육의 주체로 서며, 예술과 공동체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이순신은 교과서 속 인물이 아니라 현재의 지역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결국 이순신교육의 미래는 중앙의 기념사업이나 국가주의적 영웅 서사가 아니라 지역의 삶·기억·예술·공동체 경험 속에서 재해석될 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거제 이순신학교는 그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 첫 번째 장면이다. 지역에서 시작된 이 흐름은 단지 하나의 교육 프로그램을 넘어, 지역이 스스로 인문학적 실천을 구성하고 새로운 시민윤리를 창출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부산–거제–남해로 이어지는 해양의 공간들은 이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 인문학의 새로운 축을 형성해야 한다. 이제 이순신교육은 국가에서 지역으로, 추상적 영웅에서 감응적 시민으로, 과거의 위업에서 공동체의 미래로 이동하고 있다. 그 이동의 첫걸음이 지금 거제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