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 시기 자신이 겪은 여러 가지 사건을 『난중일기』에 기록하였다. 일기는 개인의 기록이므로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때 금방 알기 어려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또한 그 기록이 몇백 년 이전 과거의 기록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는가는 둘째치고, 해당 기록에 사용된 문장이 현대에 사용되는 표현이 아닌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난중일기』는 대략 400여 년 전에 쓰인 기록이다. 『난중일기』에는 지금까지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몇 가지 있는데, '개여지공(介与之共)'이라는 문구가 그러한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다음은 이 문구가 등장하는 해당 일기와 다음날 일기이다.
『난중일기』, 1596년 3월 9일
아침에 맑았으나 저물녘에 비가 내렸다. 아침에 우우후(전라우수영 우후 이정충)와 강진현감(나대용)이 돌아간다고 하기에 술을 대접하여 잔뜩 취했는데, 우후는 취해서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경상좌수사 이운룡)가 와서 이별 잔을 나눈 다음 떠나보내려 했으나 취해서 쓰러져 대청에서 잤다.
[원문] 朝晴暮雨. 朝 右虞候及康津告歸 饋酒泥醉 虞候則醉倒不歸. 夕 左水使來 別盃而送 則醉倒 宿于大庁. 介与之共.
『난중일기』, 1596년 3월 10일
계속 비가 내렸다. 아침에 다시 좌수사(경상좌수사 이운룡)를 청해 와서 이별 잔을 나누고 떠나보냈다. 하루 종일 많이 취해 있어서 나갈 수가 없었다. 수시로 땀을 흘렸다.
[원문] 雨雨. 朝 更請左水使而來 別盃而送. 終日大醉 未能出去. 發汗無常.
문구 '개여지공(介与之共)'은 『난중일기』 1596년 3월 9일 일기 제일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문구의 한자 가운데 '与'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與'의 속자, 간체자, 초서 등에 해당하는 글자이다. '與'는 '더불다', '같이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글자이다. 『난중일기』는 해서, 행서, 초서가 뒤섞여 있는 기록이기 때문인지 '與'와 '与' 두 글자 모두 『난중일기』의 내용에서 발견된다.

시중에 출간된 여러 『난중일기』 번역본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개여지공(介与之共)'을 '개와 함께 잤다' 또는 '개와 함께하였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개(介)'의 의미에 대해서는 번역본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미상의 인물'이나 '여종의 이름' 정도로 해석한다. '개(介)'라는 이름은, 1596년 3월 9일 일기를 제외한 『난중일기』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예전부터 '개(介)'라는 인물의 존재에 대해 종종 의문이 제기되었다. 위 일기의 내용과 정황을 살펴보아도 '개(介)'라는 인물이 뜬금없이 등장하므로 누가 보더라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介'를 검색해보면 '김개(金介)'와 같은 이름이 나타난다. 즉, 조선시대에 '개(介)'는 '여종의 이름'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난중일기』에 나타난 '개(介)'가 만약 사람의 이름이라면, '미상의 인물' 정도로만 언급하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개여지공(介与之共)'의 의미가 무엇인지 조선시대 문헌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 '여지공(与之共/與之共)'을 검색해보면 70건에 가까운 용례가 발견되며, 그 의미는 ‘그(그들)와 함께 어울리다’ 또는 ‘그(그들)와 함께 ~하다’ 정도로 해석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여지공(与之共/與之共)'의 문법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부사어/목적어] + '여지공(与之共/與之共)' + [서술어/목적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여지공(与之共/與之共)'의 용례를 살펴보면, 그 문구 앞에는 [부사어/목적어]가 올 수 있으며 뒤에는 [서술어/목적어]가 올 수 있다.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으니 실제 용례를 살펴보자.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여지공(与之共/與之共)'의 몇 가지 용례이다.
『태종실록』 권27, 태종14년-1414년 6월 23일 갑자 3번째 기사
내가 이미 그가 무죄임을 알고 불러서 이미 그와 더불어 같이 술을 마셨으니 다시 내칠 수 없다.
[원문] 予已知其無罪 召而旣與之共飮 不可更黜也.
* '이미(旣-부사어)' + '여지공(與之共)' + '술을 마시다(飮-서술어)'
『선조실록』 권3, 선조2년-1569년 8월 16일 정사 2번째 기사
임금에게 충성하고 애국하는 자들을 선택하여, 그와 함께 일을 같이하시고...
[원문] 擇其忠君憂國者 與之共事.
* '여지공(與之共)' + '일을 하다(事-서술어)'
『효종실록』 권19, 효종8년-1657년 10월 19일 무자 2번째 기사
그러므로 지금 초야에 있는 선비를 불러서 일으켜, 그와 더불어 하늘이 준 지위를 함께 하려고 한다.
[원문] 故今欲徵起草野之士 與之共天位.
* '여지공(與之共)' + '하늘이 준 지위(天位-목적어)'
위 용례들을 살펴보면, '여지공(与之共/與之共)'은 다양한 형태의 문법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 용례들 이외에 '개여지공(介与之共)'과 비슷한 흥미로운 경우도 발견된다. 다음은 그러한 용례들이다.
『중종실록』 권72, 중종26년-1531년 11월 21일 신미 3번째 기사
그 녹봉은 어머니에게 맡겨 처리하였으며, 의지할 곳이 없는 동생들과 한집에 같이 거처하면서 모두 함께 생활하였다.
[원문] 其祿俸 任其母處置 諸弟之無所歸者 同居一處 朝夕之資 皆與之共.
* '생활(朝夕之資-목적어)' + '모두(皆-부사어)' + '여지공(與之共)'
『명종실록』 권25, 명종14년-1559년 2월 9일 신해 1번째 기사
임금이 정사를 펴고 인을 베푸는 것은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님이 없으니, 산량과 천택의 이익을 모두 함께한 것은 3대 제왕의 정사였습니다.
[원문] 人君發政施仁 莫非爲民 而山梁川澤 皆與之共者 三代帝王之政也.
* '산량과 천택(山梁川澤-목적어)' + '모두(皆-부사어)' + '여지공(與之共)'
『인조실록』 권37, 인조16년-1638년 12월 2일 경인 1번째 기사
대저 그와 함께 종묘를 받들고 또한 왕화를 천명하기 위해서이다.
[원문] 蓋與之共承宗祧 亦所以丕闡王化.
* '대저(蓋-부사어)' + '여지공(與之共)' + '받들다(承-서술어)'
위 용례들을 살펴보면 '여지공(與之共)' 앞에 '개(皆-모두)' 또는 '개(蓋-대개/대저/모두)'가 오는데, 두 경우가 다 우리말 구음으로 '개여지공'으로 발음된다. 즉, 『난중일기』의 '개여지공(介与之共)'과 구음이 똑같다. '皆'는 '모두'의 의미를 갖고 '蓋'는 '대개/대저/모두'의 의미를 지니므로 거의 같은 뜻이다. 그런데 '介'도 '사이에 낀다'의 의미가 있으므로 '皆'나 '蓋'와 서로 뜻이 상통한다.
다시 말하자면, 『난중일기』에 서술된 문구 '개여지공(介与之共)'은 '皆與之共'·'蓋與之共'의 오기이거나 또는 이를 응용한 문구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여지공(介与之共)'을 해석하면 '끼어서 그와 함께 어울리다' 정도의 의미가 될 것이다.
문구 '개여지공(介与之共)'이 서술된 『난중일기』의 내용에는 전라우수영 우후 이정충, 강진현감 나대용, 경상좌수사 이운룡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인물들은 모두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에 충무공 이순신과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 수군과 전투를 치른 이력이 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을 함께 누빈 전우들이므로 충무공에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말해주듯 다들 함께 술을 마시고 흠뻑 취했다는 내용도 일기에 서술되어 있다. 이운룡의 경우는 다음날까지 이별 잔을 나누었으며, 충무공은 하루 종일 취해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까지 하였다.
일기에 나타난 문구 '개여지공(介与之共)'은 '끼어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다'로 해석하면 일기의 앞뒤 정황과도 상당히 잘 어울린다. 즉, '개여지공(介与之共)'의 '개(介)'는 '사람의 이름' 보다는 '끼어서'라는 의미의 부사어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참고로 문구 '皆與之共'이 사용된 용례를 2가지 더 소개한다. 한문의 해석이 어려워 우리말로 풀어쓰지는 못하고 원문만 소개한다.
금보(琴輔, 1521~1584), 『매헌집』 부록, 「묘지명」
先生前後淸凉之遊 皆與之共焉.
이원배(李元培, 1745~1802), 『구암집』 권14, 「일록」
信伯岡鳳來見余 皆與之共看文山詳傳.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요약하자면, '여지공(与之共/與之共)'은 『조선왕조실록』에 용례가 70건 가까이 나타나므로 조선시대에 종종 사용된 문구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구 '개여지공(皆與之共/蓋與之共)'은 그 용례가 그리 많지 않다. 위에서 살펴본 '개여지공(皆與之共/蓋與之共)'의 용례들은 『구암집』을 제외하면 모두 조선 중기 문헌에서 발견된다. 이들 사례만 가지고 어떠한 단정을 짓기는 어렵지만, 문구 '개여지공'이 주로 조선 중기에 사용되었음을 조심스럽게 추정해볼 수는 있다. 『난중일기』에 서술된 문구 '개여지공(介与之共)' 또한 '皆與之共'·'蓋與之共'의 오기이거나 또는 이를 응용한 문구로 생각된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종합DB, 금보(琴輔), 『매헌집(梅軒集)』 부록, 「묘지명(墓誌銘)」;
한국고전종합DB, 이원배(李元培), 『구암집(龜巖集)』, 「일록(日錄)」
이은상 역주, 『난중일기』, 1977, 대학서림
박혜일 외 3명, 『이순신의 일기』, 1998, 서울대학교출판부
김경수 편저, 『평역 난중일기』, 2004, 행복한책읽기
송찬섭 엮어 옮김, 『임진년 아침이 밝아 오다 난중일기』, 2004, 서해문집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