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2월 10일 ~ 3월 6일 조선 수군 함대는 경상도 웅포(熊浦, 지금의 경남 창원시 진해구 남문동 와성 마을) 일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전은 웅포해전으로 불리며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토적장(討賊狀)」에 전투 경과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웅포해전의 주요 전투 지역인 웅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웅천현」이나 여러 고지도에 그 위치가 나타나 있다. 임진왜란 시기 웅포에는 왜성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연유로 이후 이 지역 이름이 왜성리(倭城里)가 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와성리(臥城里)로 바뀌었다. 1789년 편찬된 『호구총수』에 수록된 웅천(熊川: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지명 가운데 ‘왜성리(倭城里)’를 확인할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웅포해전과 관련이 있는 지명 ‘사화랑(沙火郞)’이 등장한다. 웅포해전의 경과를 기록한 장계 「토적장」에는 나오지 않고, 『난중일기』에만 4차례 언급된 지명이다. 『난중일기』 기록을 살펴보면, 웅포해전 시기 조선 수군이 사화랑이라는 곳에 머물거나 숙박을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즉, 사화랑은 조선 수군의 활동 기점으로 활용된 곳이었다.
한국고전종합DB 홈페이지에서 ‘沙火郞’을 검색해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와 동일한 지명이 3곳 나타난다. 경상도 영일현(지금의 영일군)의 사화랑산(沙火郞山), 경상도 웅천현(지금의 진해구)의 사화랑산(沙火郞山), 전라도 흥양현(지금의 고흥군)의 사화랑(沙火郞)이 그곳이다. 이들은 모두 횃불과 연기로 긴급한 소식을 전하는 봉수가 설치되었던 산이다. ‘사화랑(沙火郞)’이라는 지명은 ‘火’라는 글자가 들어 있으므로 봉수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하다.
노산 이은상은 『이충무공전서』 번역서를 출간하면서 사화랑의 위치를 ‘창원군 웅천면’으로 설명하였다. 창원군 웅천면은 일제강점기 지명으로서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를 말한다. 아마 이은상은 지리상 위치가 가깝다는 이유로 웅천현 사화랑산을 『난중일기』의 사화랑으로 생각한 듯하다. 웅천현 사화랑산은 지금의 진해구 죽곡동에 있는 사화랑산봉수대를 말한다. 하지만 이은상의 주장은 전혀 상식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웅포해전 당시 웅천현 지역 곳곳에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으므로 조선 수군은 웅천현 사화랑산 근처에 머물거나 숙박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화랑은 어느 곳을 가리키는 지명일까? 다음은 사화랑이 언급된 『난중일기』의 여러 기록 가운데 하나로서 사화랑의 위치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난중일기』, 1593년 2월 18일
이른 아침에 군사를 움직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형세는 예전과 같았다. 사도첨사(김완)을 복병장으로 정하여 여도만호(김인영), 녹도가장, 좌우별도장, 좌우돌격장, 광양2호선, 흥양대장, 방답2호선 등을 이끌고 송도(지금의 진해구 연도동 송도)에 매복하도록 하고 여러 배들로 하여금 유인하도록 하니 적선 10여 척이 뒤쫓아 나왔다. <<중략>> 날이 저물기 전에 여러 배들을 이끌고 원포(지금의 진해구 원포동)에 이르러 물을 긷고 어두워질 무렵 영등포 뒷바다(永登後洋)로 돌아왔다. 사화랑의 진영에서 밤을 보냈다(經夜沙火郞陣).
위 기록을 살펴보면 사화랑이 영등포 뒷바다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보인다. 영등포는 조선시대 수군 만호(萬戶)인 영등포만호가 지휘하던 진포(鎭浦)로서 지금의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구영 마을 일대에 해당한다. 이곳에는 영등포성의 유적인 ‘거제 구영등성(巨濟 舊永登城)’이 남아있다. ‘영등포 뒷바다’라는 표현은 영등포와 인접한 거리라는 의미이다. 예나 지금이나 ‘뒷바다’ 또는 ‘앞바다’라는 표현은 가까운 거리를 의미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부산파왜병장(釜山破倭兵狀)」에 등장하는 ‘웅천땅 제포 뒷바다 원포(熊川地薺浦後洋院浦)’라는 표현이 그러하다. 제포는 지금의 진해구 제덕동 진해제포성지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원포(지금의 진해구 원포동)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현재 거제시 일부 현지민들은 『난중일기』에 언급된 ‘사화랑’을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최북단 곶(串)인 ‘사이말(蛇咡末)’이라고 말하고 있다. 2019년 거제문화원향토사연구소에서 출간한 『신거제지명총람』은 사이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이말(蛇咡末, 뱀부리끝, 사부리끝) : 거제도의 최북단 북위 35도 2분 28초에 위치하고 반도를 형성하여 마산을 바라보는 땅끝으로 뱀의 주둥이 모양이라 뱀부리끝 또는 사부리끝이라 하며 이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일운면 서이말(鼠咡末)과 상대하는 지명이고 노일전쟁 때 일본군의 대포 7문이 있었던 봉우리 높이 67.4m에 삼각점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의 사화랑(蛇火浪)은 이곳을 지칭한 것으로 본다.
아래는 거제도 북부 지역의 지도로서 사이말에 해당되는 곳을 점선으로 표시하였다.

『신거제지명총람』이 설명한 ‘사이말(蛇咡末)’과 『난중일기』에 언급된 ‘사화랑(沙火郞)’은 한자도 다르고 우리말 구음도 차이가 있으므로 조금 더 과거의 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편찬된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나 고지도 등에서는 이곳 지명을 언급한 기록을 찾기 어렵다. 아마 작은 곶(串)에 불과한 지명이므로 문헌 자료에 기록되지 못한 것 같다. 조선시대 자료에서 찾기 어렵다면 근대 자료에서 찾아보자.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에 작성된 지도는 ‘사이말’에 해당되는 곳을 ‘사월말(沙月末)’로 표기하였다. 아래는 그 해당 지도이다.

위 지도를 살펴보면 곶(串)의 지형을 가진 ‘사월말(沙月末)’과 ‘광지말(廣池末)’ 두 곳을 ‘말(末)’로 표기하였다. 상당히 흥미로운 지명 표기다.
아래는 1915년 제작된 「경상남도지지조서」에서 장목면의 주요 지명을 기록한 내용이다. 여기에도 지명 ‘사월말(沙月末)’이 나타난다. ‘사월말’이 나타나는 항목 ‘갑각(岬角)’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바다 쪽으로 부리 모양으로 뾰족하게 뻗은 육지’를 의미한다.

1910년대 지도나 「경상남도지지조서」(1915년)에 나타난 ‘사월말(沙月末)’ 또한 『난중일기』에 언급된 ‘사화랑(沙火郞)’과 꽤 차이가 있다. 혹시 ‘沙月末’의 구음이 ‘사월말’과 다르게 읽히거나 또 다른 지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의문을 풀어주듯이 해방 직후인 1959년 제작된 「경상남도 지명조사철」은 이곳 지명을 ‘사불리(砂拂里)’ 또는 ‘사불이’로 기록하고 지도상 기재를 ‘사위말’로 기록하였다. 아래는 그 해당 기록이다.

일제강점기 자료에 나타난 지명 ‘사월말(沙月末)’이 해방 직후 자료에 ‘사위말’로 나타난 것도 흥미롭지만, 이 지명이 현지에서 ‘사불리(砂拂里)’ 또는 ‘사불이’로 불린다는 점은 더더욱 눈길을 끈다. 근처 지명 ‘광지말(廣池末)’이 그대로 ‘광지말’로 불리는 점과 대비가 된다.
1965년에 제작된 「경상남도 지명조사철」 또한 지명 ‘사불리’와 ‘사불이’를 기록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종종 구음 ‘불’, ‘붉’을 ‘弗’, ‘佛’, ‘拂’ 등의 한자로 음차하거나 또는 ‘火’, ‘花’, ‘赤’으로 훈차하여 표기하였다. 예를 들어 거제시 둔덕면 술역리 화도(花島)는 불을도(弗乙島), 불도(弗島), 적도(赤島)로도 표기하였다. 서울 여의도는 과거 지명이 한자로 양화도(楊花島)였는데, ‘넓은 섬’이라는 의미의 우리말 ‘너블섬’을 ‘楊花島’로 차자 표기한 것이다.
구음 ‘불’을 차자로 표기한 사례들을 고려하면, 지명 ‘사불리’와 ‘사불이’는 『난중일기』에 기록된 지명 ‘사화랑(沙火郞)’과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사화랑(沙火郞)’ 중 ‘사화(沙火)’가 ‘사불’의 차자 표기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들 지명은 『신거제지명총람』에 언급된 ‘뱀불이끝’이나 ‘사불이끝’과도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단, ‘사화랑(沙火郞)’의 ‘랑(郞)’은 현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단순한 추측이지만 임진왜란 시기에 현지민들이 이곳 지명을 ‘사불랑이’ 정도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난중일기』에 나타난 지명 ‘사화랑(沙火郞)’의 위치는 그곳이 ‘영등포 뒷바다’에 있었다는 기록 때문에 지금의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구영 마을 부근으로 단정할 수 있다. 게다가 ‘사화랑(沙火郞)’ 중 ‘사화(沙火)’가 장목면 구영리 최북단 곶의 우리말 지명 ‘사불리’나 ‘사불이’와 대응되므로 이곳으로 비정(比定)하는 것이 합당하다.
사불리 안쪽 해안에서 선박이 머물 수 있는 포구는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황포(黃浦)와 동진포(東津浦)가 있다. 특히 황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거제현」에도 그 지명이 등장하므로 임진왜란 시기에도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무공은 『난중일기』에 황포나 동진포의 지명은 언급하지 않고 ‘사화랑’만 4차례나 언급하였다.
사불리는 높은 언덕으로 이루어진 지형이기 때문에 바깥 바다에서 사불리 안쪽 바다가 거의 관찰되지 않는다. 즉,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의 선박이 사불리 안쪽 바다에 숨으면 바다 건너편 웅천(지금의 진해구)이나 주변 바다에 있는 일본군이 조선 수군을 발견하기 어렵다. 충무공이 『난중일기』에 포구 지명이 아닌 ‘사화랑’을 언급한 이유는 당시 조선 수군이 그 안쪽 바다에 정박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러므로 사불리 안쪽 바다는 지금의 동진포로 비정할 수 있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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