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산사기행] 은비령 석가사

전승선

달맞이꽃은 꽃잎 닫혀 있고

금강초롱이 활짝 피어 있네.

스님은 어디 갔는지 흔적 없고

무심한 바람만 홀로 오가는데

밤에는 달맞이꽃 소곤소곤 피고

낮에는 금강초롱 초롱초롱 피어

오막살이 절집을 지키고 있네. 

 

 

쓸쓸할 땐 은비령을 간다. 설악산 깊이 들어앉아 있는 은비령을 찾아가면 쓸쓸함을 잊을 수 있다. 화엄제비꽃이 피면 은비령에 가고 하늘말나리가 피면 또 간다. 도토리 줍는 다람쥐가 보고 싶어서 가고 부엉부엉 우는 부엉이 소리가 듣고 싶어서 또 간다. 나는 사랑이 올 때처럼 은비령에 가고 사랑이 떠나갈 때처럼 은비령에 간다. 존재를 멈추고 싶어서 가고 존재를 깨우고 싶어서 나는 은비령에 간다.

 

은비령은 내게 그런 곳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설악산 깊은 산골의 적막함을 만나면 나는 ‘나’라는 위험한 짐승을 버리고 은비령 속에 숨어 두려움과 설렘 속에서 열리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그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 온종일 멍때리고 앉아 138억 년 전 우주알이 꽝 터졌던 빅뱅 때처럼 그 처음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신비로움을 체험해 본다. 빛을 뿌리는 그대를 찾아 우주를 돌아다니며 나는 이 쓸쓸한 세상을 건넌다. 

 

어느 해 은비령 깊은 산골로 들어온 스님이 있었다. 멀리 히말라야산맥 아래에 있는 라다크에 가서 티베트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오신 스님이 은비령 산골에 오막살이 절을 만들고 수행정진 했다. 나는 그 스님과 오래전에 인연을 두어 제자로 있었기에 자주 스님을 찾아뵈었다. 은비령의 1박2일짜리 은자였던 나는 히말라야 아래 라다크에서 돌아오신 스님이 하필 은비령에 수행처를 마련했는지 묻지 않았다. 스님은 라다크에서 배워온 티베트불교를 풀어놓으시며 낯선 밀교의 법향을 전해주셨다. 

 

그렇게 티베트불교가 내게로 왔다. 낯설지만 신비하고 신비하지만 비밀스러운 티베트 밀교는 가장 깊고 오래된 질문들을 던지며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쑥 들어왔다. 스님이 말없이 먼 산을 바라보거나 지나가는 바람을 만지며 홀로 미소 지을 때 그 미소 뒤에 숨어 나는 히말라야를 떠올리거나 라마승의 고요한 눈빛을 떠올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우주를 집어삼킬 것 같은 고요가 은비령을 휩쓸고 지나갔다. 

 

나는 심오한 지성에 도달한 부처들의 지혜를 체험하며 빅뱅 가설이나 우주론 따위로 난제를 생산해 내는 사람들의 과학적 사고를 이성의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고 싶었다. 스님은 세상을 포기하고 신을 택했지만, 나는 세상도 포기하지 못하고 신도 택하지 않았다. 둘 다 포기하지 못한 나는 진정한 승리자일까. 패배자일까. 쓸데없는 생각에 웃음이 났지만, 오만가지 걱정을 팔러 다니는 보험회사 직원처럼 결국 세상일을 염려하고 애쓰다가 인생 다 가고 말 것을 안다. 

 

은비령의 비밀한 숲속 오막살이 절에서 무문관 수행에 든 스님은 삼 년간 산문을 걸어 잠그고 모든 존재의 움직임을 멈췄다. 문 없는 문에 갇힌 스님의 일상은 바람이 되거나 햇살이 되어 선정의 맛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걸어 잠근 산문 앞에 몇 가지의 식량을 놓고 되돌아오며 한동안 오막살이 절도 잊고 스님도 잊었다. 잊으면서 잊은 척 살았는데 잊음이 올 때 진실하고 잊음이 갈 때도 또 진실하겠노라고 다짐했지만 잊음은 달맞이꽃처럼 소곤소곤했다가 또 금강초롱처럼 초롱초롱했다. 

 

어느 해 무문관 수행을 끝낸 스님은 어디론가 말도 없이 사라지고 오막살이 절은 잡초만 무성하게 돋아났다. 잊지 않았는데 잊은 척했던 나는 내 키만큼 자라난 잡초를 뽑으며 욕망으로 얼룩진 권태도 함께 뽑아냈다. 이 명료하고 담백한 오막살이 절집을 청소하면서 내 마음도 함께 청소했다. 잊음이 가면 가는 데로 고이 보내리라 생각하며 싹싹 쓸어 내고 닦았다. 

 

은비령의 오막살이 절은 그렇게 홀로 야위어가다가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떠난 스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오막살이 절은 숲속 동물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계정혜의 ‘三學’을 내팽개치고 속인이 되었다느니 소도시에 작은 빌라에 거주하며 짝퉁 도사가 되었다느니 하는 스님의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왔다. 마음의 강을 건넌 건 스님뿐이 아니었다. 나도 마음의 강을 건너 더 이상 은비령에 오고 싶지 않았다. 마음 없이 왔다가 마음 없이 가곤 하며 의미 따위를 두지 않았다. 

 

소설가 이순원은 그의 소설 ‘은비령’에서 잊혀진 은비령이라는 지명을 발견해 내며 인간의 인연과 별들의 시간과 우주의 질서를 이야기했는데 한계령의 허리 중간을 되넘어 가는 신비롭게 숨어있는 땅 은비령에서 나는 한때의 시절을 보내고 몇 개의 ‘시’ 조각들을 주워 도시로 돌아왔다.

 

 

이제 불타는 숲의 산문을 걸어 잠그고

그가 부르는 바람의 노래를 마저 부르리라

 

 

[전승선]

시인

자연과인문 대표

이메일 : poet1961@hanmail.net

 

 

작성 2025.08.22 10:45 수정 2025.08.2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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