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손양원은 순교자다! 손양원은 평생을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을 위로하였던 참 목사였다. 그리고 일제의 신사참배 반대를 끝까지 외치다가 여수 경찰서에 10개월 구금된 후, 광주 구치소와 광주 형무소에서 1년 6개월 형기를 마치고 1943년 5월 17일에 출옥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종신형을 선고받고, 1943년 10월 서울 구치소와 청주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광복을 맞이하고 이틀 후인 1945년 8월 17일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여순 반란 사건 때, 공산당 청년의 손에 두 아들 동인, 동신이를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손양원은 두 아들을 저격했던 공산당 청년을 용서하고, 그를 양자로 삼아 그의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그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쫓기던 공산당의 총에 맞아 순교했다.
이 지구상에 생명의 복음을 전하다가 <삼부자>가 순교한 것은, 세계 역사에 아무 데도 없을 것이다. 이 놀라운 사건을 글로 남긴 안용준 목사님은 손양원 목사를 향해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썼다. 이 책은 영어와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다. 나는 40년 전 순교자들의 설교를 연구한 책 <한국교회 설교사>를 썼고, 1년 만에 다시 재판이 나왔다. 그리고 그 책은 전 세계 10여 개 나라말로 번역 출판되었다. 2002년 내 책이 헝가리 말로 번역 출판되었을 때, 그것을 데브레첸 개혁 신학대학교와 칼빈 학회가 주관을 했다. 그때 헝가리 교회 지도자는 내게 “<손양원 모델>을 발견 했다”고 했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 손종일 장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문 서당을 공부하다 맹호은(Rev. F.J.S McRe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일본 유학 중 일본 동경의 중전중치(中田重治) 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 귀국 후 그는 경남 성경학원에 입학하고 1925년 성경학원 졸업 때 주기철 목사와 사귀게 된다. 그리고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여수 애양원(愛養院) 교회를 담임했다. 그는 당시 모두가 기피하던 한센병 환자들의 친구가 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와 일제 탄압의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는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불꽃 같은 <설교>를 통해 밖으로는 일제에 항거하면서 죄를 지적하였고, 안으로는 가련한 한센병 환자들을 위로하던 손양원 목사는 <사랑의 사도>였다.
1950년 6·25 동란 중 공산당이 남침해서 9월 13일 적도들에게 체포되어 온갖 고초를 다 당하고, 공산당에게 체포된 지 보름 후에 공산당은 목사님을 수갑 채워 질질 끌고 가다가 여수 사과밭에서 총살했다. 그렇게 손양원 목사님은 공산당들의 손에 순교의 잔을 마셨다. 손 목사님의 장례식 때 당시 <연합신문> 머리기사는, 「주의 계시를 사수한 손양원 목사의 거룩한 순교」라고 썼다. 당시 설교를 맡았던 남대문 교회 <김치선> 목사는 손양원 목사를 구약의 요셉으로 비유하면서,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기독교 나라>가 된 것이니, 이는 손 목사님의 순교의 값은 참으로 큰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달려갈 길을 다 가되 죽도록 해가며 달려 갑시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손 목사님의 순교를 모범 삼아 그와 같이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이 뒤를 이어 많이 나와 질 것을 믿습니다”
한국의 칼빈주의 보수 신학의 거목인 <박형룡 박사>는 다음과 같이 추모사를 했다.
첫째, 손 목사님은 위대한 경건의 사람이었다.
둘째, 손 목사님은 위대한 전도자였다. 신사 참배로 법관에게 취조받을 때도 관공리들에게 전도 할 좋은 기회로 삼아, 기독교 국가관, 신관, 기독관, 성경관, 죄관, 말세관을 설명했기에 조서만 100페이지가 넘는다.
셋째, 손 목사님은 위대한 신앙의 용사였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6년의 옥고를 견디고 마침내 승리했다.
넷째, 손 목사님은 나환자의 위대한 친구였다. 삼부자가 모두 나병환자 교회 안에 매장되었으니, 세상에 나환자가 또 있을까?
다섯째, 손 목사는 원수를 사랑한 위대한 사람이다. 여순 반란 사건 중 자기의 두 아들을 살해한 자를 사형 직전에 구했고, 두 아들의 장례식 때 아홉 가지 감사를 했다.
여섯째, 손양원 목사님은 의의 면류관을 쓰셨다고 했다.
손양원 목사는 대 일본, 대 공산당에 대한 그의 투쟁은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행해졌다. 그는 그 시대의 <선지자>로 거짓 정부에 항거하고, 거짓 사상에 대해 작은 체구를 가지고 천둥 같은 소리로 죄와 불의를 책망했다. 손양원 목사의 설교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중심의 설교> 그리고 <민족 구원의 설교>였다. 그의 설교 중에 「조선의 기독자여! 우리 민족을 살리자. 정계에 나간 기독자들은 기독교를 이용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진실한 정치를 하고, 교육에 나선 기독자들은 학생들에게 지식만 가르치지 말고, 지식의 근본인 여호와를 알려주고...관공서에 수고하는 기독자들은 권세와 게으름만 부리지 말고, 만인의 종이 되어 봉사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던 것처럼 봉사하기 바란다」 손양원 목사는 발을 굴리며 민족 구원의 지름길이 무엇인지 호소하였다. 손 목사님의 설교는 어떤 영역이든지 <하나님의 면전>(Coram Deo)의 삶을 뜨겁게 외쳤다. 교회는 중립이라고? 누가 그래!
지금 손현보 목사가 옥에 갇혀 있다. 이 정권이 일본 제국주의나 공산당을 대신하는지는 몰라도, 진리는 옥에 갇히지 않는다. 두고 보자! 누가 이기는지?
손현보 목사의 투옥을 보고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 정신과 삶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