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공정책신문=김유리 기자] 영화 <장미의 이름>은 움베르토 에코의 동명 소설을 장자크 아노 감독이, 대배우 숀 코넬리를 주연으로 내세우고 15세 소년 크리스찬 슬레이터의 회상 내레이션으로 스크린에 옮긴 명작이다. 영화는 방대한 원작이 130분 정도로 축약, 묘사되어 있어 아쉽다는 평도 있지만 미스테리 추리물의 형식으로 관객들의 흡인력을 높혔다는 것이 중론이다.
1327년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연이어 벌어지는 살인 사건으로, 성서의 예언처럼 악마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불안한 분위기가 엄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수사인 윌리엄과 제자는 이를 조사하기 위해 이 수도원을 찾는다.
영화 속 수도원은 단순히 신앙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세상의 진리를 독점하는 곳이요,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절대권력의 상징이다. 종교적 권위에 의해 금서 목록이 정해지고 그로 인해 사상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조차 깡그리 유린되는 중세 암흑시대의 상징이다.
연쇄살인 사건의 단초는 바로 아리스토텔스의 책, <시학 2편>이다. 이 수도원에는 세상에 단 한권 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을 보관하고 있는데, 비극을 주제로 한 1편과 달리 2편은 희극에 관한 내용이다. 희극이라고? 경건하지 못하게 웃음을 말하다니? 웃음은 한편으로는 비웃음이기도 하지 않은가? 교회에서는 신이 창조한 세상을 비웃는다는 것은 신을 비웃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런 웃음이, 사람을 더 나아가 사회를 위험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시학 2편>을 금서로 판정내린다.
웃음은 생각을 열게 하여 질문을 품게 하고, 종교적 권위에 균열을 내어 교회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교회가 인정하는 단 하나의 진리에 의심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러한 교회의 논리는 중세 시대에 자유로운 인간의 사유와 이성을 철저히 봉인해 버린다.
영화의 마지막은 장서가 가득한 도서관이 활활 불태워지는 장면이다. 아마도 감독은 도서관을 지식과 자료의 보고가 아니라 독점과 억압의 상징으로 표현하고자 했고, 그것의 전소를 통해 신본주의와 교회 중심주의가 무너지고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고자 한 것이 아닐까?
이렇듯 영화 <장미의 이름>은 암흑시대인 중세 유럽의 폐쇄적인 수도원을 배경으로 정보와 자료의 독점욕이 종교 권력과 결탁해 빚은 참극을 보여주면서 사유를 억압하는 종교의 폭력성과 성직자의 위선을 잘 묘사한 수작이다.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란 어떻게 결정되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움베르토 에코는 “웃음은 진리를 가리키지 않는다. 단지 진리를 독점하려는 자들의 옷을 벗길 뿐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교회가 그토록 빗장 안에 가두고 싶어하는 웃음이, 사실 진리로 다가가는 시발이 된다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런 폭력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층층이 위계 서열이 강한 조직이나 특히 절대적 신앙으로 무장한 종교 집단에서 말이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는 그것이 ‘웃음’이었지만 우리 시대에는 또 다른 그 ‘무엇’일 수 있다. 자신들만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아집과 그들만이 똘똘 뭉쳐 거짓으로 그들의 절대적 권위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위선적인 행태들이 우리 사회에서 보여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논리에 가스라이팅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종교에 쏟아부으며 어리석은 순종을 맹약하는 민중의 바보스러움이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다면 찬찬히 따져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진희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교육학박사)
현) 한겨레중고등학교 교장
현) 경기중등여교장회 회장
현) 한국공공정책신문 칼럼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