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5월 24일 뉴욕타임스 서평 주간지에 실린 ‘바이 더 북’ 인터뷰에서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질문: 누구나 나이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요?
답변: 어린 왕자죠. 천진함으로 우주를 바라보는 눈길을 어른이 되어도 잃고 싶지 않지요.
지난 2016년 5월 10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우주 망원경 케플러의 데이타를 분석해 1,284개의 행성을 찾아낸 뒤 이 중 9개를 ‘제2의 지구’ 후보 목록에 올렸다. NASA에 따르면 외계행성 1,284개 중 550개는 지구처럼 암석으로 이뤄졌고, 크기도 지구와 비슷하다. 행성은 구성 성분에 따라 암석으로 이뤄진 것과 목성처럼 가스로 이뤄진 것으로 분류되는데 천문학자들은 암석형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NASA에 의하면 550개 가운데 9개는 이른바 생명체 존재 가능 영역에 속하는데 중심별과의 거리를 따져봤을 때 행성 표면에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생명체 생존 가능 영역에 위치한 행성을 천문학자들은 ‘골디락스’라고 부르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외계 골디락스 중 지구와 크기가 유사한 행성은 10여 개로 NASA가 발표한 9개를 합하면 20여 개나 된다. 이 가운데 암석형이면서 실제로 물이 존재하고 대기의 양과 압력 등이 적절한 행성이 있다면 ‘제2의 지구’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이와 같은 외계행성 탐색과는 반대로 우리 내계행성 탐색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책이 한 권 나왔다. 2016년 5월 출간된 “유전 인자: 그 내밀한 역사”이다. 퓰리처상 수상작이면서 베스트셀러인 “모든 병의 황제(2010)”의 저자이기도 한 암 전문의 싯다르타 무커지 박사의 신간은 과학사상 가장 유력하고 위험한 아이디어 중 하나(유전인자)의 탄생, 성장, 영향, 그리고 미래를 탐색한다.
이렇게 우리 인간의 유전인자의 역사를 고찰한 후 저자는 “우린 스스로 자신을 읽고 쓰자”고 역설한다. 주어진 유전자를 악용하지 말고 잘 쓰자는 말이다. 과학자들은 한 인간을 만드는 데 21,000개의 유전인자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이 유전인자란 하나의 메시지로 어떻게 프로테인을 만들 것인지를 알려주는 지시 사항이란다. 그리고 이 프로테인이 형태와 기능을 만들어 유전인자를 규정짓게 된다고 한다.
또 한 권의 책이 우리 우주를 안팎으로 관찰한다. 2016년 5월 출간된 “잠 안 오는 밤에 읽는 우주 토픽”으로 ‘천문학 콘서트’ 저자 이광석은 강화도 산속에 천문대를 세우고 낮에는 천문학책, 밤에는 별을 보면서 우주를 읽으면 인생이 달라진다를 몸소 실천해왔다고 한다. “이 대우주의 속성이 일체무상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원소들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모두 별에서 왔다. 수십억 년 전 초신성 폭발로 우주를 떠돌던 별의 물질들이 뭉쳐서 지구를 짓고, 이를 재료 삼아 모든 생명체들과 인간을 만들었다. 물아일체다.” 이렇게 저자는 우주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준다.
단순히 과학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문학, 역사, 철학, 수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등을 동원한 종횡무진 다양한 비유와 예시로 천문학과 우주학을 풀어준다. 우린 어렸을 적, 시골집 마당에 펴놓은 멍석에 누워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을 보면서,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 하지 않았었나. 피아일체(彼我一體)라고 너와 내가 하나라는 말이 있지만, 우주에 관한 한 안팎이 따로 없는 내외일체(內外一體)라 해야 하리라.
그렇다면 이 내외일체인 우주의 화신이요 분신인 우리 각자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전 세계 팬들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다는 일러스트레이터 ‘퍼엉’ 본명은 박다미 씨의 2016년 출간된 아름다운 그림 에세이집 ‘편안하고 사랑스럽고 그래’에는 사소하지만 숨 막힐 정도로 로맨틱한 젊은 연인의 일상을 옮겨낸 일러스트레이션 작품들이 담겨 있다. 퍼엉은 그의 그림 에세이집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누구에게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소재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소소한 일상에서 스치듯 빛을 발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런 일상 속에 숨어 있는 의미들을 찾아서 옮겨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주는 안팎으로 다 사랑이고 우리 각자는 각자 대로 이 사랑의 화신이요 분신으로 이 우주의 사랑이 꽃피고 반짝이는 별들이어라.
만약에
이 긴 세월 동안,
이 모든 노력이
그대 삶의 이 아름다운 한 장 시기로
그대를 인도해 왔다면
지금 당장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면
처음부터 되어야 했을 사람으로
그렇게 나라는 사람이 된다면
이 모든 노력이 마침내
놀라운 결실 맺는다면
그대가 모든 부정적인 것을
긍정의 낙천주의로 바꾸면
그대의 생각과 행동이
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것으로 나는 믿지.
-작자 미상
한국일보 칼럼 ‘벤치’에서 이태희 건축가는 다음과 같이 독자의 가슴 속 깊은 감정 코드를 울려준다.
“나는 벤치를 볼 때마다 ‘좁은 문’에 나오는 제롬과 알리사가 앉던 벤치를 생각한다. ‘좁은 문’ 첫 문장은 성경 누가복음 13장 2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이다. 사랑하는 사이였던 제롬과 알리사는 나중에 헤어진다. 그들이 앉았던 벤치는 아마도 오래된 것이라서 나무가 회색빛으로 변했고 힘줄이 튀어나왔을 것 같은,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손처럼 정겹게 느껴지는 벤치일 거라고 생각한다. 콜드워터 캐년공원에는 제롬과 알리사의 벤치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시인 루미가 앉았던 것 같은 벤치가 있다. 벤치에는 루미의 시 한 구절이 남겨져 있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너를 만나리’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아니더라도, 알퐁스 도데의 ‘별’이 아니더라도, 나는 어려서 밤하늘의 별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면서 내 집을 새로 지으면 침대에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도록 설계하리라 했다.”
아,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데자뷔’였던가. 70년 전 나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처음으로 참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다. 실존하는 인물이 아니고 이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 알리사에 폭 빠져 한동안 아주 지독한 상사병을 앓았다. 내 사춘기 어린 가슴은 물론 내 먼눈 속엔 언제나 알리사뿐이었다. 알리사 외엔 이 세상에 아니 온 우주에 아무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너무 간절하게 사모하고 그리워하면서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숨 쉬듯 알리사를 애타게 애절하게 부르고 있었다. 나의 가장 순수하고 강렬한 첫사랑이었다.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그 어떤 실체 이상으로 실감할 수 있는 나의 절절한 연인이었다.
앞에 인용한 이태희 씨 글을 접하면서 이 태곳적 나의 첫사랑이 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되살아나 내 전신 세포 조직망으로 퍼지다 못해 용암처럼 분출해 내 눈앞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되고 있었다. 이태희 씨처럼 나도 어려서부터 밤하늘의 별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내 나이 40대까지 침실을 두고도 한겨울에도 노천에서 잠을 잤었다. 이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밤이나 낮이나 나는 아직도 무엇이 옳고 그름인지 별들에게 묻고 있다. 그러면서 이태희 씨가 인용한 루미의 시구 그대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곳(코스모스 핀 들판)”에서 그동안 부자연스럽게 헤어졌었던 모든 제롬들과 알리사들이 다시 만나는 장면을 그려본다.
성격이나 인격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영어 단어가 있다. 바로 캐릭터(character)다. ‘성격 혹은 인격이 운명이다’는 이 말은 ‘성격’ 없인 ‘인격’도 없다는 뜻이리라. 1990년대 중반이었나, 한 젊은 여성 시인의 성(性)에 대한 도발적인 표현에 독자들은 혼비백산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 무슨 눈가리고 아옹하듯 호들갑 떠는 야단법석인가 하면서 나는 이 여성 시인의 솔직한 용기에 큰 박수를 보냈다. 동시에 가슴 밑으로 찡한 전율까지 느꼈었다. 극심한 연민에 찬 감정이입의 엠퍼시라는 뜨거운 용암이 하늘 높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 있다면”이란 구절이 실린 최영미 시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당시 무려 52쇄까지 찍으며 어마어마한 돌풍을 일으켰다고 하지 않나. 독자들은 “입안 가득 고여 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이란 시 구절에서 한 번쯤 경기(驚氣)가 들렸다고 한다. 오죽 씹할 상대로 남자나 여자 인간 아니면 개 같은 동물 또는 가지, 오이, 옥수수, 바나나 같은 식물조차 없었으면 ‘컴퓨터’ 같은 기계하고라도 하고 싶었을까, 생각하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대자대비(大慈大悲) 이상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하는 거였다. 여고생들의 원조교제를 다루어 화제를 모았던 김기덕 감독의 작품 ‘사마리아’가 생각난다. 제54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은곰상(감독상)을 수상한 그의 열 번째 작품 ‘사마리아’의 줄거리를 이 영화를 보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해 보리라.
‘사마리아’는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뜻과 죽은 마리아 또는 성녀와 반대의 의미이나 영화에서는 역설적으로 쓰였다고 한다. 원조 교제하는 여고생과 그러한 딸의 원조교제를 알게 된 아빠의 복수와 화해를 그린 작품으로 ‘소외된 자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면서 그 속에 상징과 풍류 알레고리를 담은 미학적 영화’라는 평가받았으나, 일각에서는 영화로 포장된 여성 혐오 영화라는 비판도 있었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유럽 여행을 갈 돈을 모으기 위해 채팅에서 만난 남자들과 원조 교제하는 여진과 재영이 주인공인데 재영은 창녀, 여진은 포주 역할이다. 여진이 재영이 인척 남자들과 컴으로 채팅을 하고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으면, 재영이 모텔에서 남자들과 만난다. 낯모르는 남자들과 섹스를 하면서도 재영은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다. 모르는 남자들과 만나 하는 섹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재영을 이해할 수 없는 여진에게 어린 여고생의 몸을 돈을 주고 사는 남자들은 모두 더럽고 추한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모텔에서 남자와 만나던 재영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을 피해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여진의 눈앞에서 죽게 된다. 재영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여진은 재영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재영의 수첩에 적혀 있는 남자들을 차례로 찾아가 재영이 받은 돈을 돌려주자 남자들은 오히려 평안을 얻게 된다. 남자들과 잠자리 이후 남자들을 독실한 불교신자로 교화시켰다는 인도의 창녀 ‘파수밀다(婆須蜜多)’처럼 여진 또한 성관계를 맺은 남자들을 정화시킨다고 믿는 해괴한 논리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형사인 여진의 아버지는 살인사건 현장에 나갔다가 우연히 옆 모텔에서 남자와 함께 나오는 자신의 딸 여진을 목격하게 된다. 아내 없이 오직 하나뿐인 딸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아빠에게 딸의 매춘은 엄청난 충격이다. 딸을 미행하기 시작한 아빠는 딸과 관계를 맺는 남자들을 차례로 살해해 복수하지만, 고통은 여전하다. 영화는 아버지가 딸의 원조교제를 용서하고 자기 죗값을 치르게 되면서 끝난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아빠는 딸과 함께 여진의 엄마 산소를 찾아갔다가, 그 근처에서 딸에게 운전을 가르쳐주고 나서 미리 자수해 연락해 놓은 동료 형사에게 체포된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차를 계속 몰던 여진은 아버지가 수갑을 차고 끌려가자 서툰 운전으로 쫓아가다 진흙에 빠져 차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세월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변한 것일까. 자연의 섭리와 이치가 변하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남자는 여자를 위해 있는 존재라면 말이다. 성(性)이 불결하다고 잘못 세뇌된 만성 고질병이 아니라면 중증의 급성 결벽증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아무한테도 눈에 띄지 않고 어떤 하등의 흥미나 관심 밖의 전혀 매력 없는,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존재라면, 이보다 더 슬프고 비참한 일이 어디 또 있으랴.
꽃이 아름답게 피어도 봐줄 사람이 없거나 찾아오는 벌과 나비가 없다면 꽃의 존재 이유가 있을 수 있을까. 누가 날 쳐다본다는 건, 내가 아직 살아 있고, 젊었으며, 아무도 찾지 않는 시베리아 불모지지(不毛之地)이거나 ‘씨 없는 수박’이 아니란 거 아닌가. 물론 나 자신의 실존적인 존재감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존자대(自尊自大)의 자가보존(自家保存)하고 자아실현(自我實現)하여 자아완성(自我完成)해야 생기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