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의 전라좌수사 충무공 이순신은 전라좌수군을 이끌고 5월 4일 여수 전라좌수영에서 첫 출전을 개시하였다. 전라좌수군은 5월 4일 저녁 경상우도 소비포에서 밤을 지내고, 5월 6일에는 경상우수군과 합세한 뒤 거제도 송미포에서 밤을 보내고, 5월 7일에 옥포해전과 합포해전을 치렀다.
즉, 송미포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이 첫째 전투 직전에 머문 곳이다. 지명 '송미포(松未浦)'는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옥포파왜병장」(1592년 5월 10일)에 기록되어 있다. 송미포가 역사학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 이유는, 당시 조선 수군이 어느 바닷길을 통해 옥포로 이동한 것인지를 밝혀줄 수 있는 지명이기 때문이다.
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이었던 고 조성도 교수는 지금의 경남 거제시 남부면에 있었던 송변현(松邊縣)에 송미포가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는데, 처음에는 이 주장이 정설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이후 여러 학자에 의해 이와 다른 다양한 견해가 꾸준히 제시되었다. 인터넷에서 '송미포'만 검색해보아도 상당히 많은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송미포는 「옥포파왜병장」 이외에 『난중일기』 1596년 8월 11일에도 등장한다. 『난중일기』에 언급된 송미포에 대해서도 여러 학자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이에 관한 내용도 인터넷에서 쉽게 확인된다.
이미 여러 학자가 연구 중인 주제인 송미포의 위치를 굳이 다루는 이유는, 『난중일기』의 송미포 관련 기록 관해 학자들이 간과한 부분이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음은 지명 송미포가 언급된 『난중일기』의 해당 기록이다.
『난중일기』, 1596년 8월 11일
초경(밤 7~9시)에 거제에서 (보낸) 급보에 “왜적의 배 1척이 등산으로부터 송미포로 들어갔다.”라고 하였다. 2경(밤 9~11시)에는 다시 “아자포로 옮겨 정박하였다.”라고 보고하였다. 배를 정비하여 내보내려고 할 때 다시 “견내량을 넘어갔다.”라고 보고하기에 <故伏兵將推捉>.
[원문] 初更 巨濟馳報內 倭賊一船 自登山由入松未浦. 二更 又報阿自浦移泊. 整船出送之際 又報曰 見乃梁踰越云 故伏兵將推捉.
위 기록을 살펴보면 등산, 아자포, 송미포 3가지 지명이 등장한다. 등산과 아자포의 위치를 밝히면 송미포의 대략적인 위치도 밝힐 수 있기 때문에 현재 학자들이 등산과 아자포의 위치에 관해서도 뜨거운 논쟁을 펼치고 있다.
이글에서는 위 『난중일기』의 기록 가운데 <故伏兵將推捉>이라는 문구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문구의 해석에 따라 지명 등산, 아자포, 송미포가 위치한 지역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비록 이 문구의 해석은 이들 지명의 정확한 위치를 직접 밝혀주지는 못해도 그 대략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정황 근거가 될 수 있다.
시중에 출간된 『난중일기』 번역본들을 살펴보면, 문구 '故伏兵將推捉'에 관해 보통 두 가지 의미로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복병장을 잡아 왔다’라는 해석이며, 또 다른 하나는 ‘복병장으로 하여금 왜선을 잡아 오도록 하였다’라는 해석이다.
전자로 해석하면 위 일기의 내용은 ‘왜선이 견내량 남쪽 한산도 부근을 돌아다니다가 견내량을 넘어 도망갈 때까지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물어 복병장을 잡아 왔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에 비해 후자로 해석하면 ‘왜선이 견내량 북쪽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견내량을 넘어 한산도 쪽으로 넘어왔으므로 복병장으로 하여금 왜선을 잡아 오도록 하였다’라는 의미가 된다.
즉, ‘故伏兵將推捉’의 해석에 따라 위 일기에 등장하는 지명 등산, 송미포, 아자포의 위치가 견내량 북쪽 또는 남쪽으로 완전히 달라진다. 참고로 견내량은 지금의 경남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사이에 있는 해협을 말한다.

문구 ‘故伏兵將推捉’에 대한 해석은 전자 ‘복병장을 잡아왔다’가 옮은 해석이다. 왜냐하면 ‘복병장으로 하여금 왜선을 잡아 오도록 하였다’라는 의미가 되려면 ‘하여금’에 해당하는 사동형 글자 ‘使’, ‘令’ 등이 문구 안에 포함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난중일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동형 글자가 포함된 사동형 문장이 여럿 발견된다. 예를 들어 위 『난중일기』 기록과 같은 달인 1596년 8월 일기들 중에도 다음과 같은 사동형 문장이 여럿 쓰여있다.
1596년 8월 3일: 지이로 하여금 새 활을 당기게 하였다 - 使智伊張新弓
1596년 8월 3일: 송희립으로 하여금 아들들의 과거시험 녹명을 하게 하였다 - 令宋希立 豚等錄名
1596년 8월 21일: 아들들로 하여금 활을 쏘는 연습을 시켰고 또한 말달리며 활 쏘는 것도 시켰다 - 令豚輩射習 且馳射
문구 ‘故伏兵將推捉’이 '주어+서술어' 형태로 보이므로 '복병장이 (왜선을) 잡아 왔다'라는 의미가 아닐까? 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실제로 이렇게 해석한 『난중일기』 번역본도 있다. 하지만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推捉’의 용례를 살펴보면, 거의 예외 없이 ‘목적어+서술어’ 형태로 나타난다. 다음은 ‘推捉’의 용례가 나타난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1594년 1월 24일: 전령을 보내어 징발할 군사 144명을 잡아 왔다 - 發傳令 召募軍一百四十四名推捉
1594년 5월 22일: 황득중, 박주하, 오수 등을 격군을 잡아올 일로 내보냈다 - 黃得中朴注河吳水等 格軍推捉事 出送
1596년 2월 26일: 경상도와 전라도 수사의 영리를 잡아 왔다 - 慶尙全右道水使處營吏推捉
‘推捉’을 ‘목적어+서술어’ 형태로 사용한 것은 중국 어순이 아닌 우리나라 어순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문구 ‘故伏兵將推捉’은 ‘복병장을 잡아 왔다’라는 의미로 해석되므로, 『난중일기』 1596년 8월 11일에 등장하는 지명 등산, 송미포, 아자포는 모두 견내량 남쪽 지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한가지 언급해 둘 점이 있다.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는 『난중일기』를 비롯한 여러 충무공 관련 문헌을 모아 수록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난중일기』 초고본의 조선식 한자어와 어순을 순한문체로 바꾸었다. 예를 들어 1597년 7월 17일 일기에 나타난 지명 군영구미의 한자가 '軍營仇未'에서 '軍營龜尾'로 바뀐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구미(仇未)'는 순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단어로서 ‘바다로 길게 뻗은 두 곶 사이에 형성된 포구처럼 후미지게 생긴 땅’을 의미한다.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난중일기』는 송미포의 한자 또한 ‘松未浦’에서 ‘松美浦’로 바꾸어 기록하였다. 구영구미의 사례를 통해 추정해보면, ‘松未浦’가 순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자료]
조성도 역, 『임진장초』, 2010, 연경문화사
신윤호, 『충무록을 통해 본 충무공 인식의 재구성』, 2022, 해군사관학교 충무공 학술세미나 발표자료
이봉수·윤헌식,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 기록된 ‘구미’ 지명의 위치 고찰」, 『문화역사지리』 34, 2022, 문화역사지리학회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