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용 칼럼] 시에서 마침표란 4

해석의 여백론: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여백

마침표는 의미의 여백인가? 

해석을 둘러싼 시의 침묵인가?

이 글은 마침표 없는 시가 열어 주는 해석의 공간을 질문한다. 마침표의 부재는 시적 의미를 닫기보다 감정의 여운과 해석의 여백을 남긴다. 마침표가 삭제될 때 생성되는 감각의 지연과 의미의 유보가 독자에게 어떤 감응을 요청하는지를 살펴본다.

 

우리는 시를 읽을 때, 종종 그 마지막 줄에서 멈춘다. 정말 거기서 끝나는 것일까? 혹은 그 멈춤은, 시작을 위한 새로운 문인가? 

 

시가 주는 여운은 때로 단어가 아닌 여백에서, 말이 아닌 침묵에서 시작한다. 철학자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지금’을 해석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있는 지금은 명시된 지금과는 다르며, ‘지금’이란 지금이면서 더 이상 지금이 아닌 것임이 판명된다.” 존재는 명시되는 순간 사라지고, 대신 ‘지나간 것’으로 남는다. 마침표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마침표는 문장을 끝낸다. 동시에 여백을 열어 둔다. 그것은 마침의 기호이자 시작의 문턱이다. 이는 ‘끝은 곧 시작’이라는 현대 해석학의 요체와도 닿아 있다. 시에서 마침표는 단순한 종결 기호가 아니라, 정서가 멈추지 않고 독자의 마음에서 계속 흐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장치이다. 존재가 물러난 자리에 생기는 부재는 때로 더 풍부한 감각을 만든다. 마치 영화관의 불이 켜진 후에도 관객의 마음속 필름은 멈추지 않고 재생되듯.

 

여백의 힘: ‘침묵’이 들려주는 것들

시는 왜 끝맺지 않는가? 

이 글은 마침표 없는 시가 독자에게 여백을 어떻게 제공하며, 그 여백이 ‘해석의 자유’ 혹은 ‘감정의 유보’로 작동하는 방식을 살핀다.

마침표가 가지는 가장 중요한 시적 기능은 바로 ‘여백’을 남긴다는 점이다. 헤겔의 변증법에서 말하는 시간의 순환, 해체주의에서 강조하는 공백의 미학은 시에서도 유사하게 작용한다. 마침표 뒤에 놓인 여백은 단지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의 정서가 흐르고 상상이 채워지는 감성의 자리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원문 마지막 줄, “죽어도아니 눈물흘리우리다”에는 마침표가 없다. 이 마침표의 부재는 이별의 정서를 하나의 결론으로 닫지 않는다. 오히려 멈추지 않는 정서를 독자의 내면으로 확장시킨다. 이별은 끝나지 않고, 흐르고, 맴돈다.

 

이육사의 「청포도」 원문에서도 마침표는 없다.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은 자연스럽게 열린 종결을 향해 간다. 시적 정서는 여름의 염원과 해방의 상징을 감싸며 끝나지 않는 희망의 흐름 속에 머문다. 이러한 ‘열린 종결’은 시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일반 서사의 열린 결말이 독자에게 사건의 전개를 위임한다면, 시에서 열린 종결은 독자의 내면에서 시적 정서를 지속하게 한다.

 

교과서의 마침표는 왜 중요한가

문학 교과서는 교육이라는 목적 아래 텍스트를 일정한 구조로 정리하고 설명하려 한다. 그래서 종종 마침표를 삽입한다. 학생들이 명확한 정서를 느끼고, 흔들리지 않는 해석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자 전략이다. 하지만 그만큼 시의 다성성과 유동성은 잠잠해진다. 마침표는 흔히 ‘해석의 안전벨트’로 작용한다. 독자는 예측이 가능한 감상에 머물 수 있다.

 

시는 본래 흔들리는 것이다. 그것은 독자의 삶, 경험, 문화에 따라 매번 다른 파장을 일으킨다. 따라서 정서의 흐름을 일정하게 고정하거나 단정 짓는 마침표는 때로 시인의 의도와 거리를 두게 만든다. 마침표가 있을 때 정서는 닫힌다. 마침표가 없을 때 시적 정서는 남는다.

 

해석은 순환한다: 가다머의 해석학과 시 읽기

철학자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텍스트의 의미는 부분과 전체 간의 순환적 해석을 통해 구성된다.”라고 말한다. 해석자는 텍스트의 어느 한 구절을 읽으며 전체를 떠올리고, 다시 전체 속에서 그 구절의 의미를 되새긴다. 이것이 해석학적 순환이다. 시의 마침표 역시 이러한 해석적 움직임 속에서 새로운 역할을 한다. 그것은 단순한 종결이 아니라, 다음 해석을 위한 이정표이자 잠시 머무는 쉼표에 가깝다.

 

또한, 해석학은 객관적 정답을 부정한다. 독자의 문화, 경험, 정서에 따라 텍스트는 매번 다르게 읽힌다. 이 관점에서 보면, 마침표의 유무는 독자와 텍스트가 맺는 관계의 방식 중 하나이다. 그것은 시를 닫느냐, 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시를 어떻게 살아 있는 해석의 공간으로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침묵은 가장 깊은 해석이다

마침표는 때로 침묵을 부른다. 하지만 그 침묵은 무언이 아니다. 법정의 망치 소리가 울린 뒤의 정적, 추모식의 묵념, 공연이 끝난 뒤에 숨죽임에 이어 박수 치기 직전, 이 모든 순간은 말 없는 절정이다. 시에서도 마침표는 “이제부터 너의 해석을 시작하라.”는 초대장이다. 그것은 사유의 창, 상상의 문, 시적 정서가 흘러나올 수 있는 틈이다.

 

웹툰의 마지막 컷이 검은 여백으로 끝나듯, 시의 마침표는 우리를 무대 밖으로 끌어낸다. 독자는 거기서 질문한다. “이제 무엇을 느껴야 할까?” 이 질문이야말로 문학이 독자와 맺는 가장 깊은 대화이다.

 

열린 마침표, 열린 정서

마침표 하나로 시는 닫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한다. 시의 정수는 언제나 그 너머에서 피어난다. 언어가 멈춘 자리에서 독자의 사유는 시작한다. 침묵은 가장 큰 울림을 만든다. 그러므로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말없이 다음을 여는 기호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침묵을 듣는 일이다. 그 여백을 채우는 일이다. 우리 각자의 목소리로.

 

 

[신기용]

문학 박사

도서출판 이바구, 계간 『문예창작』 발행인

경남정보대학교 겸임교수

저서 : 평론집 10권, 이론서 3권, 연구서 3권, 시집 6권

동시집 2권, 산문집 2권, 동화책 1권, 시조집 1권 등

이메일 shin1004a@hanmail.net

 

작성 2025.10.08 09:51 수정 2025.10.0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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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