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이로 칼럼] 인공지능 시대의 사유, 인간의 변덕

임이로

내 사유는 멈춰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연구하고 글을 쓰는 일이 내 삶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으니, 참으로 편리한 일이다. 수천 년간 지속된 인간의 사유활동과 문명 전체를 학습하여 개발된 인공지능은 이제 우리에게 그럴듯한 답변과 검색 기능에서 나아가 생각지도 못한 생산능력과 공감능력까지 제공하니, 참으로 편리한 일이 맞다. 최근 MIT에서는 생성형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뇌를 썩게(rotten)하고 있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저명한 연구 기관의 발표뿐 아니어도, 우리는 뇌가 썩는 듯한 느낌을 스마트폰 하나로도 체감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인간에게 너무도 쉽게 결과를 보여주며 보상 심리를 현혹시킨다. 

 

그런데도 이 기술은 인간의 삶을 전으로 돌리기엔 이미 너무 발전했다. 이미 인간의 너무 많은 것을 대체하고 있는 수순에 돌입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는데, 과연 우리가 즐길 수나 있을까?

 

최근 인공지능 생성 기술을 활용하여 인간과 협업해 문학적인 글을 쓰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벌써부터 “우리의 고유 영역이었던 ‘창작’에 대한 숭고함을 앗아갈 생각이냐”는 비판을 들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뻐근하다. 나 또한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으며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꾸준히 의논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너무 멍청해서 우리의 글쓰기 능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완전히 반대다. 인공지능을 습관처럼 사용하는 나는, 도저히 보통 사람들보다 인공지능이 글을 더 못 쓴다고 절대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사고 과정을 인공지능에게 일부 의탁해서 더 탁월한 글을 쓰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공지능에게 내 자의식을 전부 의탁해서 그냥 전부 복사 붙여넣기 하고 싶은 욕망과 싸워내는 것이 더 힘들다.

 

하지만 인공지능에게 배우는 것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인공지능을 사용하면서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대체 불가능한 지를 깨닫는다. 무엇보다 남들과 달라 보이고 싶은 마음, 그러니까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그것이 투영된 미의식과 같은 ‘평가’의 영역은 절대 대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인공지능이 멍청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미술사 계보는 인간의 미의식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사진기의 발명 전까지는 인간이 본 것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재현’하는지가 잘 팔리는 그림의 척도였고, 화가들의 밥벌이였다. 그러나 사진기가 등장한 직후에는 화가가 필요 없을 정도로 사실 그대로를 셔터 하나로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화가들에게 사진기의 발명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의 욕망이 사진기 때문에 좌절했던가? 사진기의 등장으로 화가들은 빛의 움직임과 자신의 감성을 담아 눈앞의 것들을 새롭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화풍의 등장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표현의 결과를 ‘아름답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매스미디어(TV)의 발명으로, 모든 것이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서 자신의 작품이 아우라(aura)를 잃는 것에 절망했을 예술가들도 있었겠지만, 팝아트의 거장 앤디워홀은 오히려 복사하고 변용하는 것을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미술사 계보를 변천시켰다.

 

어쩌면 인공지능 기술도, 우리에게 색다른 미의식에 대한 탐구와 아름다움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위기이자 기회일 수 있다고. 인간은 또 한 번 절망에서 도약을 꿈꿔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희망적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황이 마냥 절망적이지도 않다. 인간은 정말이지 대단한 적응력을 지녔다는 생각뿐이다. 참으로 변덕스럽다.

 

최근 유튜브에서 넘치고 있는 ‘유리과일 ASMR’ 같은 콘텐츠는 사실 미술 화풍으로 치자면 ‘초현실주의’를 닮았다. 실제로는 재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 새롭거나 재밌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림에서 복합매체로, 인간의 표현 매체가 더 확장되었을 뿐이다. 

 

반면 댓글에는 ‘너무 인공지능이 만든 것 같아서 불편하다’는 반응도 넘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인간의 욕망은, 인공지능이 아무리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내도, 우린 거기서 인간의 흔적을 찾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공지능을 활용한 예술도 발전한 미의식 계보의 형태로 한 시대를 풍미할 것이다. 사진기와 TV의 발명 때처럼. ‘내 사유는 멈춰있다’고 글 서론에서 이야기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사실 사유를 멈추는 일을 더욱이 게을리하지 않기 위한 나 자신의 대한 경고와 다짐이다.

인공지능이 앞으로 만들어갈 세상에선 바로 이 비판적 사고력과 상상력만이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 때문이다. 절망 속의 몸부림이다.

 

그러나 새로운 아름다움은, 언제나 이러한 절망 속에서 시작되었다.

 

 

[임이로]

시인

칼럼니스트

제5회 코스미안상 수상

시집 <오늘도 꽃은 피어라> 

메일: bkksg.studio@gmail.com

임이로의 비껴서기 bkksg.com

 

작성 2025.10.10 08:55 수정 2025.10.1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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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