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동물과 달리 꿈을 꿀 수 있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꿈은 상상력으로 격상된 인간의 인식기능이라고 한다. 인간의 인식기능 중 가장 원초적이며, 인간이 이룩한 모든 문화가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꿈에 대한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합리주의자들은 꿈을 황당하고 하찮은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프로이트는 꿈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보고, 꿈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인간과 인간이 이룩한 문화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겉보기에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활동이나 표현은 합리적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성적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문화에는 동물적 욕망이 변장한 채 숨어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심리와 정신 전체의 메커니즘을 리비도라 일컫는 성적 충동의 지배로 보았다. 그 반면에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집단무의식, 원형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프로이트와 다르게 꿈의 해석을 내렸다.
그도 프로이트의 리비도 개념을 사용하였지만 리비도 즉 성적 충동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심리적 에너지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그 에너지는 단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프로이트와 견해를 달리 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문화는 인간의 욕망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나 융은 공통적으로 인간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이 사라지지 않고 꿈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들 이후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들과 전혀 다른 주장을 펼쳤다. 꿈은 상상력이라는 인간의 중요한 정신활동으로 가장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이룩한 모든 문화는 유용성의 산물이 아니라 즐겁고 행복한 꿈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정신분석학자나 심층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문화는 억압되었던 욕망이 분출된 것이거나 의식 내부에 숨겨져 있던 무의식이 발현된 것도 아니고, 우리 의식이 잠들었을 때 꾸는 꿈이 아니다. 오직 그 꿈은 깨어있을 때 찾아오는 꿈이다, 이 꿈을 몽상이라는 말로 꿈과 달리 꿈과 생각의 결합된 것으로 인간의 의식 활동이라고 보았다. 우리를 꿈꾸게 하는 것은 잠들어 있던 우리의 무의식이 아니라 언제고 활동하고 있던 우리의 또 다른 의식이다.
진형준의 『상상력 혁명』에서 “왜 현대인은 몽상에 빠지는 것이 어려워졌는가? 왜 몽상을 하는 원초적 능력을 상실했는가?”라는 의문을 제시하고 그 해답을 “모든 것을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현실적 필요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라고 제시하고 있다. 꿈은 상상력의 원천이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을 받기 위해 기대하며 잠이 드는 어린이가 될 필요는 없다. 우리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즐거움의 본능을 깨우면 된다.
즐거움의 본능에 집중해서 우리의 잠든 원초적 본능을 깨워야 하는데. 너무 분석하는데 길 들어져 있거나 유용성을 저울질하며 현실적 가치를 따지는데 익숙해져 인류의 조상에게는 일상적이고 쉬웠던 일이 오늘날 어려운 일이 되었다. 따라서 집중과 몰입만이 유용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려면, 고도의 집중과 몰입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인간은 현재 존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없는 것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창조는 인간적 삶의 중요한 본질이다. 상상력은 이와 같은 창조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며, 중요한 정신 작용이다. 따라서 몽상을 하며 원초적인 본능을 깨워내는 문학인의 삶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쳐 집중과 몰입으로 하나의 문학작품을 창조하는데 에너지를 쏟는 기쁨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문학작품은 인간의 상상력을 증진하는데 중요한 원천이 된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행위부터 유용성을 따지고, 문학 활동을 하는 문인은 문학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문인들이 쓴 문학작품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문인들이 상상력이나 창조성이 빈곤한 까닭은 바로 몽상의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직 몽상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가면서 유용성을 따지지 않고 문학작품 창작에 몰두하여 우리나라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시집『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에서 한강 서랍에서 몽상의 즐거움이 느껴지는 시 한편을 꺼냈다.
그날 우이동에는/진눈깨비가 내렸고/영혼의 동지(同志)인 나의 육체는/눈물 내릴 때마다 오한을 했다//가거라//망설이느냐/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냐//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어리석게 손 내밀었다//가거라//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가등에 맺히는 기억을 향해 나는 걸어갔다/길어가서 올려다보면 가등갓 안쪽은/캄캄한 집이었다 캄캄한/불빛의 집//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텃새들은/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 번을 죽어야 할까/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무슨 꿈이 곱더냐/무슨 기억이/그리 찬란하더냐//어머니 손끝 같은 진눈깨비여/내 헝클어진 눈썹을 갈퀴질하며/언 뺨 후려치며 그 자리/도로 어루만지며//어서 가거라//
-한강의 「캄캄한 불빛의 집」 전문
자신의 처한 현실 속에서 몽상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는 문학인의 처절한 삶은 유용성 측면에서 볼 때 답답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유용성을 따지지 않고 캄캄한 집에 들어앉아 불빛을 향해 몽상하는 몸짓이 있었기에 찬란한 조명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인류학자 질베르 뒤랑은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인간은 무엇보다 상징적 동물이며 인간을 지구상의 다른 동물과 구별하게 해 주는 것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상상력 때문이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문화는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이 상상력의 동물인 것은 인간이 지구상의 그 어떤 생물보다 미성숙 상태로 태어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운명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그 운명을 스스로 만드는 존재이기도 한다. 한강의 소설은 문인은 작품으로 말한다. 요란한 문학 활동은 빈 수레의 덜컹거림에 불과하다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유용성을 따지지 않고 몽상하는 한강 작가의 정신세계가 보이지 않는 힘의 위력을 작품으로 지구촌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소설가 한강은 대한민국 한강의 신화를 창조했다. 신화의 귀환으로 꿈을 빼앗긴 사람들에 다시 꿈꿀 권리를 작품으로 찾아 주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문학하는 길을 선택하려면 유용성으로 저울질하며 문학 주변에 서성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몽상하라. 그리고 집중과 몰입으로 문학작품을 창작하는데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캄캄한 집에 찬란한 불빛이 밝혀질 것이다.
[김관식]
시인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이메일 : kks4190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