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6월 5일(음력) 전라좌수군, 전라우수군, 경상우수군이 연합한 조선 수군 함대는 경상도 고성 당항포에서 왜선 26척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당항포해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으며, 충무공 이순신이 조정에 보낸 장계인 「당포파왜병장」에 전투 경과가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당항포’는 현전하는 지명으로서, 지금의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당항포에 해당하다. 단, 당항포해전이 실제로 벌어진 지역은 당항포 포구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포파왜병장」에 나타난 전투 정황을 살펴보면, 충무공이 언급한 ‘당항포’는 경남 고성군 당항만 일대를 가리킨다. 지난번 칼럼 ‘당항포해전의 전투 지역과 왜선 소속’에서 「당포파왜병장」에 언급된 ‘당항포’가 ‘당항만 일대’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당포파왜병장」에 따르면 당항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날이 이미 저물었기에 도로 바다 어귀(당항만 입구)로 나와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다음날 6월 6일은 비가 내리고 구름이 끼어 바닷길을 분간하기 어려우므로 당항포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가, 저녁에 고성땅 ‘마을우장(亇乙于塲)’ 바다 가운데로 나아가 밤을 보냈다.
「당포파왜병장」에 기록된 지명 ‘마을우장(亇乙于塲)’은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은 곳이다. 「당포파왜병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금의 당항만 입구와 가까운 경남 고성군 동해면의 동부 해안에 있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위치를 연구한 학자들도 대체로 이에 동의하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지명 亇乙于塲에 적힌 글자 가운데 ‘우(于)’는 글자의 모양이 ‘간(干)’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 지명을 ‘마을간장(亇乙干塲)’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충무공의 장계 사본인 『임진장초』나 『충민공계초』에 적힌 글자를 살펴보아도, ‘우(于)’와 ‘간(干)’ 중 어느 쪽이 맞는지 단정하기 어렵다. 옥편을 찾아보면 ‘우(于)’와 ‘간(干)’의 초서체는 글자의 모양도 거의 같다. 아마 글자의 모양만 놓고 따지자면, 한자 전문가들도 정확한 판단이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당포파왜병장」은 이 지명을 ‘마을우장(亇乙于塲)’으로 표기하였다.

亇乙于塲에 쓰인 한자 ‘마(亇)’가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이기 때문에 이 지명은 순 우리말 지명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하자면, 亇乙于塲은 순 우리말 지명을 훈차(한자의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것) 또는 음차(한자의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는 것)로 나타낸 차자 표기임이 거의 분명하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조차 연구자들마다 의견이 달라서, 그 위치뿐만 아니라 지명의 음가도 논란거리이다.
순 우리말 지명에 관한 연구는 역사학보다는 국어국문학이나 지명학 분야에 가깝다. 이들 분야의 기존 연구 성과 가운데에는 亇乙于塲의 음가를 밝혀줄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논문이 있다.
논문 「몇 개의 전통 건축어휘의 어원과 표기」(오창명·천득염, 『건축역사연구』 115호, 2017, 한국건축역사학회)는 현대국어 ‘머름’의 조선시대 표기 遠驗, 亇乙軒, 亇乙險, 亇乙音, 遠音, 彌音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이들 표기 가운데 일부는 지명 亇乙于塲의 표기와 상당히 비슷하다. 아래는 해당 논문에서 설명한 ‘머름’의 조선시대 표기와 발음 등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

용어 ‘머름’은 앞 논문의 설명에 따르면 ‘바람을 막거나 모양을 내기 위하여 미닫이 문지방 아래나 벽 아래 중방에 대는 널조각’을 말한다. 용어 ‘머름’의 의미와 그 모습은 국어사전이나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미닫이 문지방 아래에 머름이 설치된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앞 논문에 따르면 遠驗과 亇乙險은 중세국어 ‘멀험’의 차자 표기이며, 亇乙軒은 ‘멀험’의 ‘험’을 ‘軒(헌)’으로 표기한 것이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멀험’의 ‘ㅎ’이 묵음화하여 ‘멀엄’이 되면서 亇乙音, 彌音, 遠音 등으로 쓰였다.
이들 遠驗, 亇乙軒, 亇乙險, 亇乙音, 遠音, 彌音의 음가를 살펴보면 ‘멀’ 다음에 ‘ㅇ’ 또는 ‘ㅎ’이 나와 ‘멀’의 받침 ‘ㄹ’을 자연스럽게 받쳐준다. 이점을 고려하면 「당포파왜병장」에 언급된 亇乙于塲의 세번째 글자는 ‘干(간)’보다는 ‘于(우)’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亇乙于塲의 음가는 ‘멀우장’ 또는 ‘머루장’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 지명 중에는 亇乙于塲과 유사한 亇乙于施培라는 지명이 있다. 다음은 이 지명이 등장하는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문집 『약천집』의 해당 기록이다.
남구만(南九萬, 1629~1711), 『약천집(藥泉集)』 권4, 「소차(疏箚)」
무산(茂山)에서 북쪽으로 120여 리를 가서 정승(政丞), 파오달(破吾達), 죽돈(竹頓), 모로(毛老), 동량동(東良洞), 노토 부락(老土部落) 등지를 지나 강변에 이르면 비로소 마을우시배(亇乙于施培)라는 땅이 있으니, 마을우(亇乙于)는 오랑캐 우두머리의 이름이고, 시배(施培)는 오랑캐 말로 보성(堡城)입니다.
위 글에 등장하는 亇乙于施培는 우리나라 광복 당시 함경북도 무산군(茂山郡) 무산읍 북방 2km에 있던 주위 300여m에 달하는 옛 성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지도서』의 「무산부」와 『대동지지』의 「무산」 또한 이 지명을 각각 亇乙于施培와 亇乙于城로 서술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머름’의 사례를 고려하면 亇乙于의 실제 음가는 ‘멀우’ 또는 ‘머루’가 될 것이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북관고적기(北關古蹟記)」는 같은 곳의 지명을 ‘亇乙亐古城(멀우고성/머루고성)’으로, 『선조실록』의 기사(선조 33년-1600년 5월 8일 경술 3번째 기사)는 ‘亇乙外部落(멀외부락/머뢰부락)’으로 표기하였다. 『선조실록』의 기사는 亇乙外部落의 정확한 위치를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함경도 관찰사가 올린 계문에 언급된 점으로 보아 앞에서 언급된 같은 곳을 가리키는 지명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이들 지명 亇乙于施培, 亇乙于城, 亇乙亐古城, 亇乙外部落의 음가를 살펴보면 모두 ‘멀’ 다음에 ‘ㅇ’이 나와 ‘멀’의 받침 ‘ㄹ’을 받쳐준다. 이들 사례로 보아 「당포파왜병장」의 亇乙于塲의 세번째 글자는 ‘干(간)’이 아닌 ‘于(우)’인 것이 보다 확실해진다.
앞 논문 「몇 개의 전통 건축어휘의 어원과 표기」에서 살펴본 중세국어 ‘멀험’을 표기하는 용어 가운데 彌音의 彌가 ‘멀’을 의미하는 한자로 사용된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 이 논문은 彌가 亇의 제 글자로서 ‘멀’에서 ‘ㄹ’이 탈락한 ‘머’를 표기하였다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彌가 가진 여러 가지 의미 중에 ‘멀다’라는 뜻도 있으므로 음차 표기라기보다는 遠과 마찬가지로 훈차 표기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전자의 경우 彌音은 ‘머엄’이 되지만 후자의 경우 彌音는 ‘멀엄’이 된다. 이점을 보더라도 彌는 훈차 표기임이 확실해 보인다.
한자 彌는 약자가 弥이며 속자는 旀와 㫆이다. 이들 글자 彌, 弥, 旀, 㫆는 조선시대에 종종 물고기 ‘멸치’를 표기할 때 사용되었다. 다음은 그러한 몇몇 사례를 정리한 것이다.
(1) 성현(成俔, 1439~1504),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1, 「시(詩)」-「미어(彌魚-멸치)」
그 가운데 미어는 더욱 가늘고 작으며
(원문: 其中彌魚尤細鎖)
(2) 『일성록(日省錄)』, 정조17년-1793년 5월 27일
며어를 항구에서 잡는 자는 약간의 잡어 세를 내는데 (원문: 旀魚之港口獵捉者 徵出小雜魚稅)
(3) 이규경(李圭景, 1788~1856),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충어류(蟲魚類)」
조선의 동북 바다에 사는 것 가운데 미꾸라지 같은 작은 물고기가 있는데, '蔑魚(멸어)’라고 부르며 또는 ’旀魚(며어)’라고도 칭한다. ‘旀’는 우리 동국 글자인데, 그 음이 ‘幾字(몇 자)’의 음과 초성이 서로 비슷하므로 차용한 것이다.
(원문: 朝鮮東北海水族中 有小魚如鰍者 曰蔑魚 或稱旀魚. 旀卽我東土字 其音與幾字音 初聲相近 故借用焉.)
(4) 『각사등록(各司謄錄)』, 「통제영계록(統制營啓錄)」, 1870년 8월 19일
200냥을 주고 산 멸치 1400두와 양미(糧米) 1석을 아울러 배에 싣고 (원문: 㫆魚一千四百斗 給價二百兩 粮米一石 並載)

위 사례에 등장하는 彌魚, 旀魚, 蔑魚, 㫆魚는 물고기 ‘멸치’를 이르는 용어이다. 여기에 쓰인 글자 가운데 旀는 ‘며’ 음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이다. 이두 사전(장세경, 『이두자료 읽기 사정』, 2001, 한양대학교 출판부)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彌의 약자는 본래 弥이지만, 弥의 좌변 弓을 조금만 흘려 쓰면 方처럼 되므로 旀가 彌의 속자처럼 되었다고 한다. 이두 사전에 따르면 彌, 弥, 旀는 우리말 접속 조사 ‘며’를 표기할 때 사용되던 것으로 널리 알려진 한자이다. 예를 들어 ‘況旀(하물며)’나 ‘爲旀(하며)’ 같은 표기는 잘 알려져 있는 旀의 용례이다. 㫆는 글자의 유사성 때문에 旀와 혼용되는 한자이다.
이들 글자 彌, 弥, 旀, 㫆가 주로 ‘며’ 음을 표기할 때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나는 彌魚와 旀魚와 㫆魚의 음가가 ‘며-’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彌音(멀엄)’의 사례를 고려해보면, 조선시대 용어 彌魚와 旀魚와 㫆魚를 부르는 실제 음가가 ‘며-’보다는 ‘멸-’에 가까웠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위 사례 가운데 『오주연문장전산고』가 '멸치’의 표기를 旀魚와 더불어 ‘蔑魚(멸어)’라고도 설명한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각사등록』이나 『전라감사계록』과 같은 조선 후기 관청 자료가 종종 물고기 ‘멸치’를 ‘蔑致魚(멸치어)’로 표기한 점도 마찬가지이다. 즉, 조선시대 용어 彌魚와 旀魚와 㫆魚의 실제 음가는 ‘멸치’, ‘며루치’, ‘며르치’ 등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며루치’는 지금도 몇몇 지방에서 사용되고 있는 ‘멸치’의 방언이다.
본 칼럼의 앞부분에서 「당포파왜병장」에 언급된 亇乙于塲(멀우장/머루장)의 위치를 당항만 입구와 가까운 경남 고성군 동해면의 동부 해안으로 추정하였다. 과연 이 지역에 ‘멀우장’이나 ‘머루장’의 음가와 비슷한 지명이 있을까? 지금의 고성군 동해면은 조선시대에는 고성현 광이운면(光二運面)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지역이다. 다음의 표는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수록된 광이운면 소속 마을 지명을 현재 지명과 함께 책에 수록된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위 표에 나열한 『호구총수』의 마을 지명의 위치를 살펴보면, 각 지명은 대부분 마을이 인접한 순서대로 『호구총수』에 수록되어 있다. 『호구총수』에 수록된 광이운면 마을 지명의 특이한 부분은 ‘포도도(葡萄島)’와 ‘포도(葡萄)’라는 표기가 등장하는 점이다. 포도도(葡萄島)는 지금의 동해면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조선시대 지명이다. ‘포도도’와 ‘포도’ 표기 사이에 나타나는 7~13번 마을이 모두 동해면 동부 쪽에 위치한 점을 고려하면, ‘포도도’와 ‘포도’는 7~13번 마을이 포도도에 속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한 표기로 생각된다.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곶(串)이나 반도 형태의 지형을 가진 곳을 종종 ‘도(島)’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포도도 또한 반도의 모습으로 생겼기 때문에 이러한 지명이 붙은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포도(葡萄)의 순 우리말이 ‘머루(멀위)’라는 사실이다. 국어사전에서 ‘머루’를 찾아보면 ‘포도과의 왕머루, 까마귀머루, 새머루, 개머루, 털개머루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등의 설명이 나온다. 포도도의 순 우리말 지명이 ‘머루섬’이나 ‘머루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머루’가 「당포파왜병장」에 언급된 지명 ‘亇乙于塲(멀우장/머루장)’과 상당히 유사한 점 또한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亇乙于塲은 포도도로부터 파생된 지명으로 보인다.
위 표에 나열된 7~13번 포도도의 마을 지명을 살펴보면, 지금의 동해면 용정리 매정 마을에 해당하는 ‘며정포리(旀丁浦里)’라는 지명이 눈길을 끈다. ‘며정포리(旀丁浦里)’의 첫 글자 旀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멀’을 훈차 표기한 彌의 속자로서 물고기 ‘멸치’를 의미하는 旀魚에 사용되던 글자이다.
만일 旀를 ‘멀’의 훈차로 본다면, 旀丁의 음가는 ‘멀정’이 된다. 조선시대 ‘멸치(彌魚/旀魚/㫆魚)’의 추정 음가 ‘며루치’나 ‘며르치’ 등을 고려하면, 旀丁의 음가는 ‘며루정’, ‘며르정’ 등이 될 수도 있다. 이는 「당포파왜병장」에 언급된 亇乙于塲의 음가 ‘멀우장’ 또는 ‘머루장’과 매우 유사하다. 旀丁浦里는 그 위치가 당항만 입구와 가까우므로 본 글의 앞부분에서 추정한 亇乙于塲의 대략적인 위치와 부합하기도 한다.
다음은 『호구총수』에 수록된 지명 旀丁浦里이다.

다음은 조선시대 며정포리(旀丁浦里)에 해당하는 고성군 동해면 용정리 매정 마을을 표시한 현대 지도이다.

결론적으로 본 칼럼은 「당포파왜병장」에 기록된 亇乙于塲(멀우장/머루장)의 위치를 지금의 고성군 동해면 용정리 매정 마을로 비정(比定)하고자 한다. 이순신 장군은 1592년 음력 6월 6일 밤을 새운 곳을 ‘고성땅 머루장 바다 가운데(固城地亇乙于場洋中)’라고 했으니 매정마을 앞 바다 가운데서 진을 치고 밤을 새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봉수]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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