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상 소감]
예술은 언제나 답을 제시하기보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언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 질문이 삶의 의미를 묻고, 또 일상의 순간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기에 저는 글 속에서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문화의 미래는 결국 일상이 예술로 확장되는 지점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밥을 짓는 일, 창문을 여는 일,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조차 예술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이 글들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번 은상 수상은 제게 큰 격려이자 책임입니다. 예술과 문화가 삶 속에서 더 자연스럽게 숨 쉬도록, 그리고 글이 세상과 마음을 잇는 다리가 되도록 앞으로도 묵묵히 써 내려가겠습니다. 이 귀한 상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칼럼] 예술은 질문하는 언어다
예술은 언제나 답보다는 질문을 남겨왔다. 인류가 언어를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벽화와 몸짓은 존재했다. 동굴 벽면의 사슴과 사냥꾼은 생존을 기록한 동시에,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최초의 질문이었다. 예술은 그 시절부터 오늘까지 끊임없이 우리에게 물어왔다.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예술은 친절하지 않다. 오히려 불친절하다. 명확한 의미를 밝히지 않고, 뚜렷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불친절함이야말로 인간의 사고를 자극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시인은 행간을 비워두고, 화가는 붓질을 멈춘다. 그 빈틈을 채우는 것은 관객의 해석이다. 우리는 작품 앞에서 멈춰 서고, 자신에게 묻는다. "왜 이 장면은 나를 울리는가? 왜 저 선율은 내 기억 속의 누군가를 불러내는가?" 예술은 언제나 열린 질문이며, 우리는 그 질문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공동 저자다.
오늘날 우리는 답을 강박적으로 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학교는 정답을 요구하고, 기업은 숫자를 요구하며, 정치 역시 통계와 데이터로 정당성을 입증한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모호하다. 사랑은 수치로 측정되지 않으며, 죽음은 해부학적 정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우정과 연대, 상실과 희망은 공식으로 풀 수 없는 영역이다. 이때 예술은 언어와 논리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발휘한다.
나는 예술을 ‘공명 장치’라 부른다. 작품은 창작자의 고독 속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관객과 만나면서 진동한다. 그림 한 장이 누군가의 기억을 소환하고, 음악 한 곡이 수십 년 전의 첫사랑을 되살린다. 그 순간 예술은 나와 타인을 잇는 보이지 않는 실이 된다. 사회가 분절될수록, 개인이 고립될수록 이 실은 더욱 절실해진다.
역사를 돌아보자. 전쟁과 재난 속에서도 사람들은 노래를 불렀다. 고려 말의 향가는 민중의 고통을 담았고, 일제강점기의 시는 절망 속 희망을 붙드는 몸부림이었다. 20세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누군가는 작은 악기를 꺼내 연주했다.
그 음악은 생존을 넘어, 인간으로 남아 있겠다는 선언이었다. 물리적 생존이 빵과 물에 달려 있다면, 정신적 생존은 예술에 달려 있다. 예술은 또한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자 균열을 드러내는 도끼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쿠르베는 "예술은 사회의 참된 모습을 반영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한국의 김수영은 ‘풀’이라는 짧은 시를 통해 압제에 눌린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예술은 감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고, 변화를 촉발하는 힘을 품는다.
결국 예술은 ‘정답 없는 교과서’다. 작품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자기 이해와 타자 이해를 위한 길잡이다. 같은 작품이라도 누군가는 상실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차이는 곧 다양성이고, 다양성은 예술의 생명력이다.
질문이 멈추는 순간 예술은 죽고 문화의 숨결도 멎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불친절한 예술 앞에 머문다. 답을 주지 않기에 더욱 간절히 붙들 수밖에 없는, 그 질문의 힘을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