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칼럼] 차이에 대한 담론, 앵프라맹스(inframince)

홍영수

‘앵프라맹스(Inframince)’라는 말은 마르셀 뒤샹이 직접 꾸며낸 말이다. 이 말은 어원적으로 ‘아래’를 뜻하는 ‘infra’와 ‘얇다’는 뜻의 ‘mince’의 합성어 이다.‘눈으로 식별할 수 없는 초박형(超薄型)의 상태’를 뜻한, 뒤샹이 만들어 낸 미학적 개념이며, 완벽한 실체가 없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과 그 가장자리를 설명할 때 많이 언급되는 말이다.

 

창작을 몸에 휘두른 시인과 예술가의 창조적인 사유의 핵심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기보다는(無中生有) 오히려 유有에서의 미세한 차이差異를 발견하고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마르셀 뒤샹의 <샘>의 작품에 알 수 있듯이 우린 어떤 이론이나 현상에 대해 획일성과 결정성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사고를 해체하고 경계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한다. 이때 앵프라맹스의 초박형의 상태인 미묘한 차이의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차이의 삶 속에 숨은 내적 세계는 다층적인 감성에 의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그러나 분명히 눈앞에는 없으나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묘사할 때, 두 사물 간의 틈새나 두께, 넓이 등에서 앵프라맹스는 인용된다. 이러한 때 앵프라맹스의 사유에서는 현실 너머의 가상적인 잠재적 가능성까지도 사유의 확장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세탁소에서 갓 찾아와 옷장에 걸어 둔 양복과 그 양복을 입고 외출 후 돌아와 벗어 놓은 양복의 미세한 차이라든가, 한복을 입을 때 옷고름 매는 소리와 치맛자락의 끌리는 소리의 차이, 악수할 때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온도의 미세한 차이 등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창조의 미학을 실현할 수 있듯이.

 

1寸인 부모와 자식, 2寸간의 형제자매와 부부 사이, 사랑하는 연인과 지란지교의 친구 사이에도 좁은 틈새와 얇은 막이 형성되어 있다. 어쩜 천사와 공기 사이에도 엷디엷은 막이 존재하지 않을까? 어느 날 티브이 시청 중 화면에 비치는 어느 배우를 예쁘기는 한데 아주 예쁘지는 않다고 했더니, 옆지기는 너무 예쁘다고 한다. 아, 이 얇고 얇은 막, 시각의 차이, 내가 너일 수 없고, 네가 나일 수 없는 좁은 간극, 그 얇은 막은 항상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 뒤샹의 말인, ‘앵프라맹스’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서 ‘마르셀 뒤샹 회고전’에 갔었다. 필라델피아미술관이 공동주최하는 전시회인데 여러 작품 중 우리들에게 익숙한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이 눈에 확 들어왔다. 현대 미술의 거장답게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기성 제품을 새로운 위치에 올려놓음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생성했다. 예술이라는 개념을 확 뒤집어 놓은 것이다. 레디메이드인 작품이 외관상 같아 보이지만 그 얇디얇은 초박막의 차이, 앵프라맹스를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앵프라맹스는 동일성의 논리를 차이의 논리로 극복하고 확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이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아파트 사이의 은행잎들이 보행로에 수북이 쌓여 있다. 모두들 좋아하며 은행잎을 집어 들어 휘날린다. 그들은 ‘은행잎’이라는 동일어로 표현한다. 그렇지만 같은 은행잎도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어떤 잎은 찢겨 있고, 어떤 잎은 구부려져 있다. 차이의 모습들이다. 또한 같은 노란색에서도 미세한 색의 차이가 있다. 이러할진 데, 과연 같은 은행잎, 같은 노란색의 동일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동일성’을 강조하게 되면 잘 드러나지 않은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우린 그 차이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풍부함과 다양성의 세계관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방금, 외출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외출 때의 모습과 문 열고 들어오는 나의 모습은 피부의 미세한 톤과 머리카락의 미세한 흐트러짐, 그리고 현관문 밖과 방 안의 온도 등의 차이에서 우린 동일성이 아닌 차이의 반복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노란 은행잎에는 고정된 객관적인 실체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체적이고 자기 반영적 시선인 앵프라맹스의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우린, 시비와 미추, 서사와 상징, 내용과 형식 등과 같은 이항대립의 틀 속에 갇혀 판단하고 사고하는 것을 넘어, 틀이라는 틀의 사유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그렇기에 감성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문학, 예술들의 창작자 집단들에게는 미세한 차이의 담론인 실천적 개념의 앵프라맹스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동일성보다 부분들의 차이가 더 중요하다.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작성 2025.11.03 10:54 수정 2025.11.03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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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