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매번 첫사랑이자 끝사랑이다

이태상

우리는 흔히 단 한 번뿐인 인생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 잘 좀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럼 우린 인생을 몇 번 사는 것일까? 1991년에 개봉된 영화 ‘베로니크의 두 개의 삶’은 자신과 꼭 닮은 사람이 있다는 ‘도펠갱어’의 신화를 다루고 있다. 폴란드의 크시슈토프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작품이다. 

 

같은 날 폴란드와 프랑스에서 태어나 세상 어딘가에 쌍둥이 같은 제 짝이 있다는 강한 느낌과 확신에서 날로 더욱 간절해지는 열망으로 살아가는 두 여인 이야기다. 스위스 출신 여배우 이렌느 야곱이 1인 2역을 맡은 폴란드의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베로니크가 교차하는 인물을 통해 삶을 두 번 살게 된다면 어떻게 달라질까를 천착한 영화다.

 

우리 모두 삶을 두 번 산다고 아니 매일이면 매일, 매번 새롭게 산다고 생각해 보자. 오늘 만나는 가족, 친구, 친지, 이웃,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어제의 그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내일 만날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나부터가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날이면 날마다 시시각각으로 항상 변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아기 때, 한창 젊었을 때, 중년 때, 내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현재의 나도 미래의 내가 아닌, 지금 당장 있는 그대로의 내 성정이나 외모도 한순간 뒤의 내가 아닐 테니까. 

 

그게 어디 사람뿐이겠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도 언제나 급속도로 변하고 있지 않은가. 이게 어디 또 인간세상뿐이랴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계도 기후변화를 비롯해서 계속 달라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을 두 번이 아니라 숨 쉬는 만큼의 수만 번, 수억 번 사는 동안 매 번 새롭고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도 첫사랑뿐이 결코 아닌 두 번째, 세 번째, 억만 번째 사랑해볼 수 있으리라. 첫사랑은 단 하나뿐이라지만, 실은 사랑은 매번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아닌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두 번 다시 없을 단 한 번뿐일 사랑이다. 씁쓸하고 쓴 사랑도, 달콤하고 달짝지근한 사랑도, 시큼 새큼한 사랑도, 눈물 콧물 나도록 매운 사랑도, 아니면 싱겁기 짝이 없을 사랑도, 또는 데일 만큼 뜨겁거나 꽁꽁 얼어붙을 만큼 찬 사랑도, 끈끈하고 질긴 사랑도, 산뜻 상큼하고 안타깝게 허전하고 아쉬운 사랑, 등 오만 가지 사랑을 다 맛볼 수 있지 않으랴. 산다는 건 사랑하는 것일 테니까.

 

사랑하고 좋아할 일이 어디 한 둘인가. 사람도 좋지만 동물, 식물, 광물 다 아름답지 않은가. 하늘도 땅도, 해와 달과 별도, 산도 바다도, 눈, 비, 바람, 구름도, 벌, 나비, 새도, 잠자리와 반딧불이도, 풀과 꽃과 나무도, 세상에 신비롭고 경이롭지 않은 게 어디 있으랴. 그 무엇보다 비록 찰나적이나마 네가 있고 내가 있다는 이 기적 이상의 축복을 만끽해 누려보리라. 이렇거늘 어찌 우리가 단 한시라도, 단 한 가지라도, 언제 어디에서든, 무엇이고 당연시 할 수 있겠는가. 눈을 떠도 감아도, 숨을 들이쉬어도 내쉬어도, 살면 살수록, 사랑하면 할수록, 와도 와도 닿는 데 없고, 가도 가도 끝 간 데 몰라라. 아, 이 벅찬 감격 어찌 다 감당할 수 있으랴!

 

다음번이 아닌 이 순간순간의 삶에서도 제대로 충분히 널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음번 꿈을 꾸며 넋두리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오늘 이승에서 열심히 살지 못하면서 어찌 내일 내생에서인들 잘 살 수 있겠는가. 부모 형제 자식 가릴 것 없이, 가까이 같이 있을 때 살아생전에 못 한 걸 사후에 후회한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여기서 ‘너’라는 상대는 단순히 너가 아닌 지금 내 삶에서 내가 마주 대하는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의 노래 제목 그대로 ‘지금 아니면 영 그만이야’가 아니겠는가. 우리 그 가사를 음미해보자.

 

지금 아니면 영 그만이야

 

지금 아니면 영 그만이야,

어서 다가와 날 좀 꼭 안아줘 

사랑하는 나의 임아 내게 키스해줘

오늘밤 내 것이 되어줘

내일이면 너무 늦을 테니까

지금이 아니면 영 그만이야

내 사랑은 기다리지 않을 거야.

 

그토록 사랑스런 미소를 띤 

널 내가 처음 보았을 때

넌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내 영혼은 네게 홀딱 빠졌어

이런 순간을 기다리며

내 한평생 보내려 했는데 

마침내 네가 내 곁에 있는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야.

 

지금이 아니면 영 그만이야,

어서 다가와 날 좀 꼭 안아줘

사랑하는 나의 임아 내게 키스해줘

오늘밤 내 것이 되어줘

내일이면 너무 늦을 테니까

지금이 아니면 영 그만이야

내 사랑은 기다리지 않을 거야.

 

모든 걸 다 바치는 

우리의 참사랑을 잃는다면 

우는 버들 나뭇가지들처럼

우리도 대양만큼 눈물을 흘릴 거야.

네 입술은 날 자극해

잔뜩 날 흥분시키니 

네 두 팔로 뜨겁게 끌어안아 줘.

언제 이렇게 우리가 다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이 아니면 영 그만이야,

어서 다가와 날 좀 꼭 안아줘

사랑하는 나의 임아 내게 키스해줘

오늘밤 내 것이 되어줘

내일이면 너무 늦을 테니까,

지금이 아니면 영 그만이야

내 사랑은 기다리지 않을 거야.

 

 

중앙일보 칼럼 ‘삶의 향기’에 실린 ‘​사랑의 묘약’​에서 서울시오페라단장은 저 유명한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에 나오는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을 소개하면서 아래와 같이 칼럼 글을 맺고 있다.

 

“겸손, 인내, 숨은 선행, 희생,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 같은 것은 이제 현실에서 보기 어려워졌다. 이것을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부모들이 과연 있을까 싶다. 혹여 그 가르침대로 살다가 아이들이 실패자가 되기 똑 알맞은 세상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은 영악스러운 사람이 최종 승리자가 되는 오페라나 숨은 선행이 끝끝내 짓밟히는 연극을 보러 가진 않는다. 우리가 찾는 것은 이런 약이 아니다. 엉터리 같지만 ‘사랑의 묘약’​이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혹은'욕심을 버려라.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은 루저의 논리의 극치일 터인데 사람들은 교회나 절을 찾는다. 돈이 너희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 맞더라도 이를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기엔 우리가 삶에 너무 지쳐 있다. 그래서 이따금 묘약을 먹고 기운을 차려 다시 한번 현실이라는 아디나(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예쁜 처녀)에게 도전해 보는 것이리라. 네모리노(잘 생기지도 않았고 부자도 아니며 용기도 없지만 아디나를 좋아하는 전혀 스펙이 안 되는 총각)들이여 힘을 내라”

 

자, 이제 위키백과를 이용 ‘사랑의 묘약’ 스토리를 옮겨보자.​

 

“‘사랑의 묘약’은 가에타노 도니제티가 펠리체 로마니의 대본을 바탕으로 작곡한 2막짜리 오페라이다. 1832년 5월 12일 밀라노의 카노비아나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도니체티는 이 작품을 단 2주일 만에 썼다고 한다. 2막에서 네모리노가 부르는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특히 유명하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 시골의 젊은 농부 네모리노는 아름다운 지주의 딸 아디나를 짝사랑한다.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네모리노는 떠돌이 약장수 둘카마라에게서 사랑의 묘약을 구입한다. 하지만 사랑의 묘약은 정체는 싸구려 포도주인 터라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네모리노는 그저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져 노래를 부른다. 아디나는 마을을 찾은 군인 벨코레의 청혼에 응하지만 막상 결혼 계약서를 앞에 두고는 서명을 미룬다. 둘카마라에게서 새로운 묘약을 살 돈을 구하기 위해 네모리노는 군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네모리노는 친척에게서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부자가 되고 많은 여자들이 그에게 관심을 표한다. 하지만 그걸 모르는 네모리노는 자신이 둘카마라에게서 산 새로운 약이 약효가 듣는 거라고 믿는다. 한편 아디나는 네모리노가 자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군대에 들어갈 생각까지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감동한다. 벨코레에게서 네모리노의 군입대 계약서를 찾아온 아디나는 네모리노에게 그것을 내밀고 두 사람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일요일에 일곱 살짜리 외손자 일라이자를 수영장에 데리고 갔다 나오면서 전처럼 어부바를 하고 ‘개천야, 아냐’ 내가 선창하면 제가 복창하다 말고 느닷없이 내게 묻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이제 내가 너무 무겁지 않아?”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아직까진 아니야. 하지만 몇 년 지나면 넌 더 크고 힘이 세질 테지만 할아버진 약해질 테니까, 그땐 할아버질 네가 업어줘야 해.” 그러자 외손자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지난해 3개월이나 조산한 제 여동생 ​쥴리아를 업어줘야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을 거란다. ​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쾌재를 불렀다. 아, 이것이었구나! 자연의 섭리 내리사랑이란 것은 물이 언제나 아래로 흐르듯이, 사랑도 그렇다는 것을.​ ​사랑은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비교도 할 수 없게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을. 이런 순간순간이 한없이 소중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이런 매​ ​순간이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고 영원무궁토록 단 한 번뿐이란 것을 말이다. 사랑을 먼저 받아 봐야 사랑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세상에 남녀나 부모형제 또는 친구 사이는 물론 어떠한 종류의 사랑이든, 누군가를 뭔가를 사랑하는 것 이상의 ‘묘약’이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새삼 터득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5.11.08 11:21 수정 2025.11.0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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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