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7월 8일(음력)에 벌어진 한산도대첩은, 조선이 제해권을 쥐는 계기가 되는 중요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견내량파왜병장」은 한산도대첩의 경과를 자세히 기록한 자료로서, 이 장계에는 전투 직전 왜선 함대의 규모와 이동 경로가 서술되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견내량파왜병장」
(1592년 7월 7일) 목동 김천손이 신(전라좌수사 이순신) 등의 수군을 바라보고는 급히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적선 대·중·소 총 70여 척이 금일 미시(오후 1~3시)에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거제와 고성 경계인 견내량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라고 하기에 <<중략>>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총 73척)이 진을 벌이고 정박해 있었습니다.
* 영등포: 경남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구영등성 일대
* 견내량: 경남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와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사이 위치한 해협
위 「견내량파왜병장」의 기록은 한산도대첩 직전 조선 수군이 왜선 함대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경위와 함께 그 정보의 내용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들 왜선 함대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또 다른 자료가 존재한다. 임진왜란 시기 경상감사의 참모였던 이탁영(李擢英, 1541~1610)의 일기 『정만록(征蠻錄)』이 바로 그 자료이다.
『정만록』은 꽤 유명한 임진왜란 관련 사료이기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을 들어보신 분들이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현재 한국문화원연합회에서 지원하는 '지역N문화' 사이트에서 한글로 번역된 『역주 정만록』(이호응 역주, 1992, 의성문화원)을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바란다.
『정만록』은 일기뿐만 아니라 여러 편의 장계도 수록하였는데, 그 장계들 가운데에는 여러 현직 관리가 전쟁 상황을 보고하는 공문의 내용을 모아서 적은 것도 있다. 그러한 공문들 가운데에는 한산도대첩 직전 왜선 함대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보고서가 2건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정만록』, 「곤(坤)」
(1) 진해현감 권규(權逵)의 급보에 "(1592년) 7월 7일 아침에 대·중·소 구별이 되지 않는 왜선 70여 척이 가덕도 근처를 떠나 견내량을 향해 가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 조선시대 진해는 지금의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진전면·진북면에 해당한다.
(2) 고성현령 김현(金絢)의 급보에 "진해현의 현통(縣通)에 의하면 7월 6일 유시(오후 5~7시)부터 아침까지 왜선 70여 척 안에 대선 1척과 함께 그 나머지 중선·소선이 뒤섞여 김해강으로부터 천성보에 이르러 밤을 보내고, (7월) 7일 진시(아침 7~9시)에 출발하여 노를 저어 거제군 칠천도를 미시(오후 1~3시)쯤에 지나 견내량으로 향하였고 <<중략>>"라고 하였습니다.
* 현통(縣通): 군현끼리 서로 정보를 알리는 통문(通文)
* 김해강: 서낙동강
* 천성보: 부산 강서구 천성동 천성항
* 칠천도: 경남 거제시 하청면 칠천도
「견내량파왜병장」과 『정만록』의 기록을 비교해보면, 우선 왜선 규모가 70여 척으로 서술된 점이 서로 일치한다. 단, 「견내량파왜병장」이 총 73척으로 정확한 숫자를 서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왜선의 크기를 각각 대·중·소로 구분한 점에서 조금 더 자세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일본 측 사료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는 한산도대첩에 참전한 왜선 규모를 60~70척으로 기록하였는데, 이 자료 또한 우리나라 기록과 거의 부합한다.
70여 척 왜선의 이동 경로는 「견내량파왜병장」보다 『정만록』의 기록이 더 자세하다. 「견내량파왜병장」이 왜선 이동 상황을 7월 7일부터 기록한 점에 비해, 『정만록』은 그 전날인 7월 6일부터 기록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7월 7일 미시(오후 1~3시)부터의 왜선 이동 상황이 두 기록 모두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견내량파왜병장」은 왜선 함대가 미시(오후 1~3시)에 영등포 앞바다로부터 견내량으로 이동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정만록』은 왜선 함대가 미시(오후 1~3시)쯤에 칠천도를 지나 견내량으로 이동했다고 기록하였다. 두 기록에 각각 등장하는 영등포와 칠천도는 거리상으로 매우 가깝다. 따라서 7월 7일 미시(오후 1~3시) 이후 두 기록의 내용은 거의 똑같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정만록』에 나타난 7월 6일 유시(오후 5~7시)부터 7월 7일 미시(오후 1~3시) 이전까지의 기록은 한산도대첩 직전 왜선 함대의 이동 경로를 보다 자세히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견내량파왜병장」에는 이 기록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해주는 내용이 있다. 다음은 그 해당 기록이다.
「견내량파왜병장」
5령장(領將) 최도전이 잡은 서울 사는 사노(私奴) 중남과 사노 용이, 경상도 비안에 사는 사노 영낙 등을 문초한 바에 따르면 "왜적들이 내려올 때 용인(龍仁)에 이르러 우리나라 군사(兵馬)와 만나 전투를 벌였는데, 우리나라 군사가 후퇴하였습니다. 김해강에 이르러서는 왜장이 문서로 여러 왜군에게 알리는데, 마치 우리나라 장수들이 약속하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왜군이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키며 매번 '전라도'를 말하면서 혹은 칼을 뽑아 물건을 치는 것이 목을 베어 죽이는 모습과 같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한산도대첩에 참전한 일본군 장수는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로서 1592년 6월 5~6일에 벌어진 용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력이 있는 왜장이다. 일본 측 사료인 『와키사카기(脇坂記)』에 따르면, 와키사카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얼마 뒤인 1592년 5월 13일 한양에 이르렀으며, 5월 중순 도성에서 7리(우리나라 기준으로 약 70리) 떨어진 산기슭에 요새를 마련하였고, 6월 5일경 용인 전투에 참전하였다.
위「견내량파왜병장」의 기록에 따르면 서울에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사노들은 용인으로 이동하여 일본군과 조선군이 전투를 벌인 것을 목격하였는데, 이는 『와키사카기』에 기록된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이동 상황과 일치한다. 또한 위 「견내량파왜병장」의 기록은 왜군이 용인 전투 이후 김해강에 이르렀다고 서술하였는데, 이는 『정만록』에 언급된 왜선 함대의 출발지와 일치한다.
요컨대 한산도대첩 직전 왜선 규모와 이동 경로는 「견내량파왜병장」, 『정만록』, 『고려선전기』, 『와키사카기』 등의 여러 사료를 교차 비교함으로써 더욱 명확하게 밝혀질 수 있다. 이들 기록을 근거로 하여 한산도대첩 직전 왜선 70여 척의 이동 경로를 현대 지도에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성도 역, 『임진장초』, 2010, 연경문화사
이호응 역주, 『역주 정만록』, 1992, 의성문화원
김시덕 역, 『와키사카기(脇坂記)』, 『문헌과 해석』 제62호, 2013, 태학사
김시덕 역, 『고려해전기(高麗船戰記)』, 『문헌과 해석』 제57호, 2012, 태학사
(이 책의 역자는 한국어로 뜻이 잘 통하도록 책 제목 '高麗船戰記'를 '고려해전기'로 옯겼다고 밝혔다.)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