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역사] 49. 슈리성(首里城)의 정비와 왕국의 상징

슈리성(首里城), 해양 왕국 류큐의 심장이 되다

삼산 통일 이후 슈리성이 국가 중심으로 자리 잡은 이유

외교·종교·정치를 관통한 슈리성의 공간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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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성(首里城)은 약 450년 동안 존속한 류큐 왕국의 정치·외교·종교 중심지이자 해양 국가의 위상을 집약한 상징 공간이다. 1429년 쇼하시(尚巴志)에 의해 삼산(三山)이 통일된 이후, 슈리성은 단순한 방어 거점을 넘어 국가 운영의 핵심 무대로 기능하였다. 이 성은 권력의 집약, 국제 질서와의 접속, 그리고 종교적 정당성을 동시에 구현한 공간이었다.

 

쇼하시는 통일 직후 기존의 거점이던 우라소에(浦添)를 대신해 슈리(首里)를 새로운 수도로 확정하였다. 슈리는 나하항(那覇港)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지녔으며, 해상 교역과 내륙 통치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선택은 류큐가 군사 국가가 아닌 해양 상업 국가로 나아가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1427년, 쇼하시는 중국 도래인 회기(懐機)를 국상으로 등용해 슈리성 일대의 대대적인 정비를 명했다. 용담(龍潭) 연못 조성, 성 주변의 인공 지형 정비, 나하와 슈리를 잇는 장홍제(長虹堤) 축조는 단순한 토목 공사가 아니라 국가 행정망 구축의 일환이었다. 이로써 슈리성은 항구·행정·의례를 연결하는 거대한 통치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었다.

 

슈리성 정전(正殿)은 류큐 국왕의 집무 공간이자 명나라 책봉사(冊封使)를 맞이하는 외교 무대였다. 이 공간에서 국왕은 중국 황제의 권위를 매개로 자신의 통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았다. 1458년 쇼태구왕(尚泰久王)이 주조한 만국진량의 종(万国津梁の鐘)은 류큐가 동아시아 바다를 잇는 가교 국가임을 선언한 상징물이었다.

 

슈리성은 정치 공간인 동시에 종교 성역이었다. 성 내부에는 우타키(御嶽)가 분포했고, 그중 쿄노우치(京の内)는 최고 신녀 키코에오오기미(聞得大君)의 즉위 의식이 거행되던 장소였다. 이는 국왕과 신녀가 역할을 분담해 통치하는 제정일치 체제가 공간적으로 구현된 사례였다. 정치 기구인 평정소(評定所)와 관료 좌석 체계 또한 성 내부에 배치되어 권력의 질서를 가시화했다.

 

슈리성은 왕조의 흥망과 함께 수차례 소실과 재건을 겪었다. 1453년 시로·푸리의 난, 근세의 화재, 1945년 오키나와 전투로 인한 완전 파괴는 성의 물리적 형태를 무너뜨렸지만, 상징성까지 지우지는 못했다. 1992년 복원, 2019년 화재 이후 재건 논의는 슈리성이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오키나와인의 역사 기억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슈리성은 군사 요새가 아닌 해양 왕국 류큐의 국가 운영 모델을 응축한 공간이다. 이 글은 슈리성을 통해 류큐의 중앙집권화, 국제 외교, 종교 체계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독자는 오키나와가 일본 본토와 다른 역사 궤적을 가졌음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슈리성은 왕조의 궁궐을 넘어 류큐라는 국가가 세계와 자신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체다. 반복된 파괴 속에서도 재건이 선택된 이유는, 슈리성이 오키나와 정체성의 핵심 축이기 때문이다. 슈리성의 역사는 곧 류큐 왕국의 역사이며, 오늘날 오키나와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의 출발점이다.

작성 2026.01.16 08:21 수정 2026.01.16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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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