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기억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벽을 향해 앉아 눈가리개를 한 채 무방비 상태로 놓인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의족이 바닥을 끄는 소리다. 삐걱, 삐걱. 서서히 다가오는 이 소리는 앞으로 전개될 폭력의 예고편이다. 오늘은 이 고문에서 살아 감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동지를 팔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지, 어떤 무자비한 속삭임에도 굴복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얼굴조차 알 수 없는 자의 숨결이 귓가에 닿는다. 이제 폭력의 시간이다.
자파르 파나히의 2025년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그저 사고였을 뿐>에는 노골적인 고문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피해자들의 기억을 통해 당시의 폭력을 복원한다. 그들이 토해내는 것은 고통의 재현이 아니라, 고통 이후의 삶이다. 자신들을 고문했던 자에 대한 증언과 한탄만으로도 관객은 충분히 그 잔혹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폭력의 순간이 아니라, 그 순간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고문 휴유증으로 허리 통증을 달고 살아가는 바히드는, 어느 날 자신을 고문했던 에크발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다. 바히드는 에크발의 집을 알아내고 차를 수리하고 있던 그를 납치한다. 하지만 그는 라시드라는 이름을 갖고 있고 그가 에크발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화는 이때부터 그가 진짜 가해자인지를 가려내는 미스터리 구조로 전환된다. 그 진위를 밝히기 위해 모인 사람들 역시 바히드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그에게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이다. 서점을 운영하는 살라르, 사진가인 시바, 결혼을 앞둔 신부 골리, 시바의 과거 연인이었던 다혈질의 하미드가 바히드의 밴에 모여든다. 이들 역시 눈이 가려진 채 고문을 당했기 때문에 아무도 에크발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이들이 에크발을 기억할 수 있는 건 의족을 끄는 소리, 그의 체취, 다리 생김새 등이다. 청각, 후각, 촉각에 의해 재구성되는 에크발은 그가 행했던 신체적 폭력보다 그가 했던 언어적 폭력이 더 가학적이었다. 인간 이하의 경멸적 언행은 이 피해자들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와 기억을 남겼다. 그래서 절름발이를 마주했을 때 그게 이미 오래전에 행해졌던 일인데도, 생생하게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피해자들은 에크발에 대한 복수를 감히 행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도구함에 잠들어 있는 저 자는 분명 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 그 놈이 맞지만 보다 명확한 확증이 필요하다. 만에 하나 그가 에크발이 아닐 경우 억울한 피해자가 다시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혈질의 하미드가 당장 그의 목을 분질러 버리자고 할 때도 나머지 사람들은 이를 말린다. 다들 마음속으로는 복수를 행하고 싶어하지만 실행에 옮기려는 이를 뜯어말리는 것도 이들이다. 이들의 순박한 행동은 에크발의 딸아이에게 온 전화를 받으면서도 이어진다. 이들은 만삭인 에크발 부인의 출산을 도와 병원에 데려가고 출산 과자를 사 와서 나누어 먹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돈까지 거두어 축의금까지 마련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순박하고 평범한 일반 시민 중 하나일 뿐이다.
사실 바히드가 고문을 당했던 이유는 그가 당시에 노동자였고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정당한 항의였다. 이런 항의와 시위는 혁명수비대에 의해 세워진 위대한 이란 공화국을 위협하는 행동이었다. 허리를 다쳐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고, 성폭력에 의해 처녀성을 잃고,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건 그저 한밤 중 어두운 거리를, 차를 몰고 지나가다 지나가던 떠돌이 개를 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낮 '그저 사고였을 뿐'인 거다. 이 체제와 최고 지도자를 위해 시리아에 가서 다리를 잃고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월급 좀 밀렸다고 정권을 위협하는 빨갱이들은 적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내용이다. 기업의 발전을 위해 근로기준법쯤은 가볍게 무시해도 된다.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벌이는 일은 반국가 단체에 동조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로 위장한 불순세력들은 깡그리 잡아 처넣어야 하며 국가 전복 세력은 총으로 쏴 죽여도 된다. 백만 명쯤 탱크로 밀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한 신권정치나 자유민주주의로 위장한 독재체제에서 한 개인의 불편함은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 질서를 지키기 위해 곤봉을 차고 다니는 경찰들은 결혼을 앞둔 신랑에게 돈을 요구할 수 있다. 현금이 없으면 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긁어서라도 뇌물을 내야 한다. 살인적인 물가에 빵을 살 수 없으면 굶어서 견뎌야 한다.
복수를 위해 모였던 피해자들의 여정은 산부인과 병원 앞에서 마감하게 된다. 처음에 이 일을 벌였던 바히드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에크발을 풀어줄 것인가 아니면 다시 구덩이에 파묻을 것인가! 바히드의 밴은 산길을 올라간다. 자파르 파나히의 전작 <노 베어스>에서 주인공 감독이 국경을 넘을지 고민했던 그 국경 마을의 산길이다. 에크발로 의심되는 남자를 나무에 묶고 그의 사죄를 받기로 한다. 여기서 파나히 감독은 예술 영화들이 가지는 모호한 열린 결말을 선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파나히 감독이 동료 감독을 옹호하다 감옥에 갇혔던 시기에 만났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던 남자는 사진가 시바의 등장에 무너진다. 눈가리개를 한 그는 그가 예전에 심문했던 그 피의자들처럼 울부짖는다. 잘못했다고...
그가 진정 자신의 과거 행적을 뉘우쳤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바히드의 악몽이 끝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다. 다시 평온을 되찾은 바히드의 가게에 다시 비걱대는 의족 소리가 심장의 울림소리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삐걱, 삐걱, 삐걱
지금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요 사태를 역사가 어떻게 기록할지는 알 수 없다. 인터넷이 차단된 거리에서 시위대는 총에 맞아 쓰러지고, 사상자 수조차 가늠할 수 없다. 불과 1년 전, 우리 역시 계엄령과 군인에 의한 국회 진입이라는 위기를 목격했다. 미국에서는 이민단속국 요원의 총격으로 시민이 사망한다. 시대와 국가는 달라도 권력을 쥔 자들의 오만은 항상 같았다. 그들은 자신의 판단만이 정의라 믿고, 그 믿음은 언제나 폭력으로 귀결된다.
<그저 사고였을 뿐>이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폭력이 남긴 시간이다. 가해자는 이름을 바꾸고 가정을 꾸리며 현재를 살지만, 피해자는 과거에 묶인 채 매일 다시 심문당한다. 의족을 끄는 소리는 끝나지 않은 고문의 리듬이며, ‘사고’라는 말은 국가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반복해 온 가장 비열한 알리바이다. 자국에서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파나히 감독은 영화로 질문을 던진다. 과거를 사고로 덮어버린 사회에서, 과연 미래는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질문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가.
K People Focus 모하지 칼럼니스트(mossisle@gmail.com)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며 아이들에게 독서와 글쓰기를 가르치는 희망의 칼럼니스트 .
케이피플 포커스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용시 표기 의무
■ 제보▷ 전화 : 02-732-3717
▷ 이메일 : mossisle@gmail.com
▷ 뉴스홈페이지 : https://www.kpeoplefoc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