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교정 한 켠에 암수 한 쌍의 조선시대 사자상이 서 있다. 사자라면 응당 위엄과 긴장감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이 사자상은 어딘가 어색하고 우스꽝스럽다. 눈은 과장되게 크고, 표정은 엄숙하기보다 친근하며, 자세 또한 권위를 과시하기보다는 사람을 맞이하는 듯하다. 처음 보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웃음을 짓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조선의 선조들은 왜 사자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조선의 해학은 흔히 '웃음'으로만 이해되지만, 실은 단순한 농담이나 익살이 아니다. 조선의 해학은 세계와 권위를 다루는 태도였고, 엄격한 질서 속에서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지혜였다. 사자는 본래 불교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이며, 정치적으로는 왕권과 권위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중국이나 서역의 사자상이 위압적이고 근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조선은 그 사자를 완전히 무섭게 만들지 않았다. 이는 기술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인 선택에 가깝다.
조선 사회는 유교적 질서가 지배한 사회였다. 위계는 분명했고, 규범은 엄격했다. 그렇기에 그 사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긴장을 완화할 장치가 필요했다. 해학은 그 역할을 맡았다. 조선의 해학은 권위나 질서 자체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대신 권위를 숨 쉬게 만든다. 무너뜨리지 않고 낮추며, 부정하지 않고 풀어낸다.
이화여대 교정의 사자상은 바로 그런 조선의 세계관을 상징한다. 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공간을 지키고 있다. 기능은 유지된다. 그러나 그 방식은 부드럽다. 사자는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허락한다. 이는 신성함과 일상의 경계를 낮추는 미감이며, 초월적인 것을 인간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태도다.
조선의 해학이 가진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웃음은 저항이 아니라 공존의 방식이었다. 이 사자상은 말없이 말한다. 세상은 완벽할 필요가 없다고, 권위는 무거울수록 오래가지 못한다고, 지켜야 할 질서도 숨 쉴 틈이 있어야 한다고.
오늘날 우리는 종종 전통을 엄숙함으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조선의 문화는 생각보다 훨씬 유연했고, 인간적이었다. 웃음을 허락할 줄 알았고, 권위를 낮추는 미학을 알고 있었다. 이화여대 교정의 사자상은 그 사실을 돌에 새긴 채, 지금도 묵묵히 서 있다.
조선의 해학은 비웃음이 아니라, 세계와 오래 함께 살기 위한 미소였다. 그 미소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웃을 줄 아는 사회를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