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면에는 유리병과 잔들이 놓여 있습니다. 물을 담았던, 혹은 막 비워진 듯한 투명한 그릇들. 그런데 이 유리들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맑음’이나 ‘깨끗함’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면은 고르고 반짝이기보다, 거칠고 두텁습니다. 물감이 여러 번 쌓이고 긁힌 흔적들이 유리의 투명성을 방해하듯 남아 있죠. 투명하지만, 쉽게 들여다볼 수는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제목과 이미지가 만납니다.이 작품에서의 ‘투명함’은 비어 있음이나 드러남이라기보다, 오히려 지나간 것들이 남긴 흔적에 가깝습니다. 잔은 투명하지만, 그 안을 채웠던 시간들, 대화, 침묵, 기다림은 이미 사라졌고, 대신 표면에 기억처럼 눌러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유리들은 현재보다는 과거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구도 또한 흥미롭습니다. 쓰러진 잔과 곧게 선 잔이 함께 놓여 있고, 병은 중심을 약간 비켜서 자리합니다. 정돈된 정물이라기보다, 사람이 막 자리를 뜬 뒤의 테이블을 보는 느낌에 가깝죠. 모든 것이 멈춰 있지만,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은 상태. 이 어정쩡한 균형이 작품에 시간을 머무르게 합니다.
색감은 절제되어 있습니다. 회녹색과 탁한 갈색, 그리고 흰 선으로만 유리를 그려내며, 빛은 과장되지 않습니다. 덕분에 이 그림은 공간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스며듭니다. 집 안에 걸린다면, 햇빛이 강한 곳보다 오후의 빛이 천천히 기울어드는 벽, 혹은 동선 끝에 잠시 멈추게 되는 자리에 잘 어울릴 작품입니다. 처음엔 배경처럼 있다가, 어느 순간 문득 시선이 머무는 그림이지요.
이 작품의 매력은 설명이 아니라 동행에 있습니다. 특정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보는 이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도록 여백을 남겨두니까요. 시간이 지나도 쉽게 낡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비어 있음’으로 보이던 유리가, 몇 해 뒤에는 ‘버텨온 시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이 그림 앞에서 잠시 이런 질문을 남겨두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투명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