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라는 빈 대지에 벽을 세우고, 가구를 놓고, 그 안에 꿈꾸던 ‘나’를 초대하는 순간, 평범했던 일상은 한 편의 영화가 된다. The Imaginary Pocus가 [창간특집기획연재] “oo을 사랑한 아티스트’ 시리즈의 여섯 번째 주인공으로 만난 아티스트는 붓끝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건축하고, 그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행복을 연기하는 "행복한 일상"을 사랑한 아티스트, 김가리(Kimgari) 다.
2026년 1월의 끝자락, 그녀에게 캔버스는 단순한 그림판이 아니라 현실의 결핍을 채우고 미래의 희망을 미리 살아보는 ‘상상의 무대’가 된다.

공간과 패션의 경계, 그 치밀한 미장센
김가리(Kimgari) 작가의 이력은 다채롭다.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을 지도하고, 인테리어 스타일링과 그림 사업을 병행하며 치열한 20대와 30대를 보냈다. 이러한 경험은 그녀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단단한 지반이 되었다. 그녀는 일반적인 회화 작가들과는 조금 다른 순서로 그림을 시작한다.
"저는 캔버스를 하나의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벽을 세우는 일을 먼저 하고, 가구를 놓고, 그 다음에 사람을 그립니다. 자연스럽게 공간과 가구에 질감을 더하면 평면적인 부분이 입체적으로 보이고, 작품을 보는 저와 작품 속 공간이 마치 하나가 됩니다."
실제 인테리어 스타일링을 하듯 동선과 가구의 비례를 계산하는 그녀의 작업 방식은 독창적이다. 작가는 "아직도 도면과 투시라는 틀이 있어, 회화적 허용을 통한 불가능한 배치를 시도하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캔버스 안에서도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여전히 동선과 비례를 따져 그리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 치밀함 위에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감각이 더해지며 독보적인 스타일이 탄생했다. 인물은 정지해 있지 않고 과감하게 몸을 틀어 공간을 장악하며, 옷의 주름과 패브릭의 질감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 생생하다. 타인을 위한 디자인을 하던 그녀가 오롯이 ‘나다움’을 찾기 위해 든 붓은 이제 대중에게 가장 세련된 시각적 유희를 선사하고 있다.
캔버스 위, 또 다른 자아 '그녀(Her)'를 만나다
김가리(Kimgari) 작가의 작품 중심에는 항상 강렬하고 자유분방한 한 여인이 존재한다. 작가는 이 여인에게 특정한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단지 ‘그녀’라고 부른다. 작품 속의 그녀는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거나, 꽃향기를 맡고, 때로는 도발적인 시선으로 관객을 응시한다.
"배우가 영화 속 배역이 되어 연기를 하는 것처럼 저도 제 작품의 그녀가 되어 작품 속에서 많은 꿈들을 이루고자 합니다. 현실에서 못다 한 저의 가까운 미래 세상에 대한 희망과 기대, 감정의 표현들을 작품으로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작품 속 여인은 작가의 '페르소나'다. 현실의 김가리가 쉴 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생활인이라면, 캔버스 속의 김가리는 가장 여유롭고 화려하며 '나다운' 시간을 만끽한다.
독자들은 그녀의 그림을 보며 단순한 감상을 넘어, 작가가 초대한 상상의 공간에서 함께 휴식을 취하고 위로를 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 구체적인 여성상을 넘어선 '무(無)의 세계'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공간을 표현해보고 싶습니다."라는 그녀의 말에서 깊어가는 예술적 고뇌가 엿보인다.


작가의 시선이 머문 곳, '인생작' 3선
수많은 작품 중, 작가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세 가지 작품에 대해 김가리(Kimgari) 작가가 직접 입을 열었다. 이 세 작품은 그녀의 예술적 여정을 대변하는 이정표와도 같다.
첫 번째 작품은 <그 공간 (The Space, 2023)>이다. 초록색 소파에 앉아 꽃무늬 옷을 입은 여인을 그린 이 작품은 작가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실제 공간에서 출발했다. "제가 존경하던 분의 공간에서 일할 때 판매했던, 그분이 좋아하셨던 색감과 디자인의 소파였습니다. 그 공간이 떠오르면 그곳의 향기와 공기, 분위기가 생각나서 그대로 화폭에 옮겨보았습니다." 기억 속의 공간을 현재로 소환하여 재구성하는 작가의 탁월한 공간 연출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두 번째는 <달콤한 나의 휴식 (My Sweet Rest, 2022)>이다. 집에 있는 물감 튄 듯한 점박이 컵을 들고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여인의 모습은 김가리식 '여인 시리즈'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저의 스타일을 정립하게 해 준 작품이자, 가장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쉴 틈 없는 저에게 '가끔은 여유도 괜찮다'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아 가장 좋아합니다." 가장 담백하면서도 작가가 추구하는 '휴식'의 본질이 담겨 있다.
세 번째는 <황홀한 밤에 (In the Ecstatic Night, 2022)>다. 남편과 마포대교 위에서 불꽃놀이를 보던 황홀한 순간을 몽환적으로 그려냈다. "불꽃놀이를 보는 순간 샤갈의 작품이 떠올라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우산을 쓰고 날아가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행복한 저녁 시간을 상상하며 그렸습니다." 사랑과 낭만, 그리고 상상력이 결합된 이 작품은 김가리 작가가 꿈꾸는 '행복'의 절정을 보여준다.
AI 시대, 기술을 통해 선명해지는 ‘상상의 좌표’
The Imaginary Pocus는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인간 고유의 상상력이 가지는 가치는 더욱 빛난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붓과 물감이 주는 아날로그의 카타르시스를 사랑하는 김가리(Kimgari) 작가에게, AI라는 최첨단 기술은 어떤 의미일까. 그녀에게 AI는 상상의 경쟁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방대하게 펼쳐진 상상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고, 그 세계관을 견고히 다지는 '사유의 파트너'로 기능하고 있었다.
"AI 시대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기에 절대로 배제해서는 안 될 존재로 여겼습니다. 이 생각도 얼마 안 되었습니다. 작품 세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AI와 많은 대화를 나누고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과 정리를 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습니다. 나의 세계관을 정리하고 질문하는 도구로써 사용하는 것은 당연히 맞다고는 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문이 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에게 상상의 힘은 막연한 공상이 아니다. 기술과의 문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렇게 선명해진 내면의 밑그림을 캔버스라는 물리적 공간 위에 붓질로 건축해 나가는 치열한 과정인 셈이다. AI를 통해 '나'를 확인하고, 손끝으로 '세계'를 짓는 그녀의 방식은 디지털 시대 예술가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공존법일지도 모른다.

2026년, 멈추지 않는 확장과 소통
김가리(Kimgari) 작가는 최근 국내외를 오가며 숨 가쁜 일정을 소화했다. 지난 2025년 7월 오사카 아트쇼(PLAS)에 이어, 며칠 전 성황리에 막을 내린 서울아트쇼 (2025.12.31~2026.1.19)까지 참여하며 글로벌 무대와 국내 컬렉터들에게 그녀의 가능성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작가는 "해외와 국내 페어를 모두 겪으며 큰 목표보다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항상 그림 그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즐겁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예정입니다."라며 단단한 소회를 밝혔다.
현재 그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두 곳에서 열려 있다.
첫째, K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기획전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 2025 (Geeky Land 2025)>다. 작년 9월부터 시작된 이 전시는 올해 2월 28일까지 이어지며, 작가는 관객들이 "작품 속 그녀와 하나가 된 듯 즐거웠다"는 메시지를 보내올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고 전했다.
둘째, 1월 28일부터 시작된 서울 마곡에 위치한 'ArtNGallery' 개관전이다. 2월 8일까지 짧게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서 김가리는 '공간'에 더욱 집중한 신작을 선보인다.
"기존 작품과 결을 같이 하면서도 선과 면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공간을 위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린 톤의 배경과 오렌지 컬러 소파, 그리고 블랙 원피스를 입은 여인의 대비가 돋보이는 작품을 주목해 주세요."
작가의 말처럼 이번 신작들은 인물 중심의 구성을 넘어, 공간 그 자체가 건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그녀의 심화된 예술 세계를 보여준다. 2주가 안되는 짧은 만남이지만, 인물과 공간이 빚어내는 새로운 조형적 시도를 통해 한층 깊어진 작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행복한 일상"을 향한 끝없는 상상
인터뷰 말미, 작가에게 "당신을 예술가로 살게 하는 단 하나의 원동력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행복한 일상"이라고 답했다. 기술이 발달하고 시대가 변해도 그녀가 붓을 놓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루를 아주 잘 살아 보기를 바랍니다. 즐겁게, 신나게, 행복하게!"
김가리(Kimgari) 작가는 붓을 통해 일상의 찰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치환한다. 그녀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잊고 지냈던 여유와 낭만, 그리고 '나다움'을 발견한다. 타인을 위한 디자인에서 시작해 자신을 위한 예술로, 그리고 이제는 관객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메신저로 거듭난 "행복한 일상"을 사랑한 아티스트, 김가리(Kimgari). 2026년, 그녀가 캔버스 위에 또 어떤 매혹적인 공간을 건축하고 우리를 초대할지, 그 설레는 행보를 주목해 본다.
[아티스트 소개: 김가리 (Kimgari)]
성신여대 산업디자인과 졸업 후 패션 일러스트와 인테리어 경력을 바탕으로 캔버스 위에 독창적인 공간을 건축한다. 작품 속 페르소나 그녀(Her)를 통해 현실의 결핍을 희망으로 채우며, 강렬하고 자유분방한 시선으로 관객에게 위로를 건넨다. 2025 오사카 아트쇼 및 서울아트쇼, K현대미술관 이상한 나라의 괴짜들 2025 등에 참여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행복한 일상을 원동력으로 가장 스타일리시한 휴식의 공간을 그린다.
[The Pocus Archive: 아티스트 아카이브 – OO을 사랑한 아티스트]
AI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결국 인간의 마음과 상상의 힘에 있다. 본지 The Imaginary Pocus는 창간을 맞이하여 기술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감성과 상상 세계를 지켜가는 예술가들을 조명하는 연재 시리즈 [OO을 사랑한 아티스트]를 선보인다. The Pocus Archive는 앞으로도 자신만의 가치를 사랑하며 자신의 원하는 미래를 실현하는 아티스트들을 엄선하여 기록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