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른이 된다는 건 언제부터일까. 법적으로는 성인이 되는 순간이 있고, 사회적으로는 경제적 독립이나 직업을 가질 때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느끼는 ‘어른의 감각’은 그와 다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는 상태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을 어른이 되는 시점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학생 시절에는 정답이 있었다. 문제를 풀면 채점 기준이 있었고, 잘하는 이유가 설명되었으며, 틀리면 어디서 잘못됐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사회 초년기에도 비슷했다. 선배가 있었고, 매뉴얼이 있었고, ‘이렇게 하면 된다’는 암묵적인 경로가 존재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선택은 여전히 많지만, 설명은 사라진다. 누구도 대신 결정해주지 않고, 결정의 결과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된다. 이때부터 삶은 더 이상 친절하지 않다.
오늘날 어른들의 피로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판단해야 할 순간이 지나치게 많아졌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언제 멈춰야 하는지,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에 대해 누구도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알아서 하라”는 말은 자유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책임을 전적으로 떠안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는 선택의 권한을 개인에게 넘겼고, 실패의 비용 또한 개인에게 귀속시키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 구조 속에서 불안은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요구하는 ‘결정의 밀도’가 지나치게 높아진 결과에 가깝다. 어른이 된 이후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결정을 내린다. 일의 방향, 관계의 거리, 소비의 기준, 미래에 대한 설계까지. 이 결정들에는 더 이상 정답도, 참고서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결과로 평가받는다. 선택은 자유였지만, 결과는 점수처럼 남는다. 이 간극이 어른들을 지치게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몇 년간 심리 상담, 코칭, 타로, 사주와 같은 콘텐츠가 확산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미신의 유행이 아니라, 설명 없는 결정의 시대에 나타난 하나의 사회적 반응이다. 사람들은 미래를 정확히 알고 싶어서라기보다, 잠시라도 선택의 부담을 내려놓고 싶어서 질문을 던진다. “내가 가는 방향이 맞을까”라는 물음에는 사실 이런 뜻이 담겨 있다. “이 선택을 나 혼자만 책임져야 하는 게 맞을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확신 없이 결정을 내리는 연습을 반복하는 일이다.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도 선택하고, 결과를 견디며, 필요하다면 방향을 수정하는 능력.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 이후의 자신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설명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는 태도, 그게 어른의 조건에 가깝다.
우리는 종종 어른을 ‘단단한 사람’으로 상상한다. 흔들리지 않고, 답을 알고, 감정을 통제하는 존재처럼 그린다. 그러나 실제의 어른은 다르다. 어른은 흔들리면서도 결정을 미루지 않는 사람이고, 불확실함을 안고서도 삶을 계속 운영하는 사람이다. 설명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이어가는 사람. 그것이 성숙이다.
이제 어른의 삶에는 매뉴얼이 없다. 대신 질문만 남아 있다. 이 길이 맞는지, 이 선택이 충분한지, 지금의 나로 괜찮은지. 중요한 건 그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답을 얻는 일이 아니라 답이 없는 상태를 견디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설명받지 못하는 상태는 결핍이 아니라 조건이다. 이 조건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을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어른의 삶이란 원래 불확실하고, 때로는 불친절하며, 종종 혼자 감당해야 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어른다움은 완성된 태도가 아니라, 계속 조정되는 태도에 가깝다. 오늘도 우리는 설명 없는 선택 앞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어른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