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은 왜 선을 원하면서도 욕망에 흔들리는가
- 칸트 윤리학이 던지는 통찰
인간은 언제나 선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의지는 끊임없이 욕망의 중력에 흔들린다.
이 모순된 존재의식이 바로 칸트가 탐구한 인간의 본질이다. 그는 인간이 욕망의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스스로의 행위를 이성의 법칙 아래 두려는 ‘도덕적 주체’라고 보았다.
칸트의 윤리학은 단순히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자유롭게 선을 선택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철저한 사유의 체계다.
욕망이 우리를 구속할 때, 이성은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러나 그 자유는 방종이 아닌 ‘도덕법칙에 복종하는 자유’다.
그는 말했다.
“자유란, 타율의 지배를 벗어나 스스로 법칙을 세우고 그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칸트가 말한 자유와 의무, 그리고 도덕법칙의 자율성을 다시 읽어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인권, 그리고 AI 윤리까지 이어지는 철학적 근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자연적 충동이다. 생존과 쾌락, 인정욕구와 성공욕이 복합적으로 얽혀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러나 도덕은 그 욕망을 제어하라고 명령한다.
이 모순의 간극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칸트는 이러한 갈등을 ‘자연의 법칙과 자유의 법칙의 충돌’로 해석했다. 인간이 단순히 자연적 존재라면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욕망을 넘어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다.
이성은 우리 안에서 “해야 한다(Sollen)”라는 명령을 발한다. 바로 이것이 ‘정언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이다.
“네 행위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이 명령은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이성에 의해 세운 내적 법칙이다. 욕망은 외부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지만, 이성은 우리 안에서 자유를 부여한다.
따라서 도덕적 인간이란 욕망의 억압이 아니라, 욕망을 초월해 자신이 세운 법칙에 따라 사는 존재다.
칸트는 윤리학의 출발점을 ‘선의지’에 두었다.
그는 “오직 선의지만이 무조건적으로 선하다”고 단언했다. 선의지는 외적 결과나 감정, 타인의 평가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행위가 옳은 이유는 그것이 유익하거나 결과가 좋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칸트의 선의 개념은 현대 사회의 가치 체계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오늘날 선행은 종종 보상의 수단이 되고, 윤리적 행위조차 홍보나 이미지 관리의 도구로 전락한다. 칸트라면 단호히 말할 것이다. “그것은 선의가 아니다.”
진정한 도덕적 행위는 ‘옳기 때문에 하는 행위’이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존엄을 자율적 의지의 표현으로 보았다.
타인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가 세운 이성의 법칙에 따라 행동할 때 인간은 도덕적 주체가 된다.
이제 칸트 철학의 심장부로 들어가 보자.
그가 말한 ‘의무(Pflicht)’와 ‘자율성(Autonomie)’,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진정한 자유의 개념이다.
칸트에 따르면, 의무는 외적 강제가 아닌, 이성에 의해 스스로 부과한 법칙에 대한 복종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명령 때문에 선을 행한다면, 그것은 ‘타율(Heteronomie)’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것은 자율의 산물이다.
따라서 도덕적 인간이란 타율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성으로 법을 세우고 그 법을 지키는 존재다.
이때 ‘자율성’은 단순한 자유방임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이 욕망의 지배를 거부하고, 보편적 도덕법칙을 자기 안에서 입법(立法)하는 능력이다.
즉, 인간은 자기 안에서 “모든 인간이 따라야 할 법칙”을 세우는 입법자이자 피치자이다.
이 사유는 혁명적이었다.
칸트 이전의 도덕은 신의 명령이나 사회의 규범에 종속된 타율적 체계였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도덕의 입법자로 선언했다.
신이 아닌 인간이, 외부의 법이 아닌 자기 이성에 의해 도덕의 법을 세운다.
그는 말했다.
“자유는 도덕법칙의 조건이며, 도덕법칙은 자유의 이념이다.”
이 문장은 인간 존재의 존엄성을 선언하는 철학적 기념비다.
도덕은 강제가 아니라, 자유의 실천이다.
의무는 억압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엄을 증명하는 행위다.
그러나 현대의 자유는 종종 자율이 아닌 방종으로 변질되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자유가 있다’는 주장은 칸트적 의미의 자유가 아니다.
칸트에게 자유란 욕망에서의 해방이지, 욕망의 추종이 아니다.
우리가 쾌락, 성공, 효율성, 데이터의 논리에 휘둘릴 때,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그것은 단지 욕망의 타율에 종속된 상태일 뿐이다.
진정한 자유는 이성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세운 도덕의 법에 복종할 때 가장 자유롭다.
이 역설이 바로 칸트 윤리학의 핵심이다 — “복종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것.”
칸트의 자율 개념은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국가의 법과 사회의 규범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그것은 외부의 강제가 아닌 시민 각자의 자율적 동의와 이성적 입법 참여를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
즉, 도덕적 자율이 정치적 자율로 확장된 것이다.
현대 사회의 윤리 위기는 ‘자율의 상실’에서 비롯된다.
타인의 기준, 사회의 시선, 알고리즘의 피드백에 의해 행동하는 개인은 더 이상 스스로의 입법자가 아니다.
SNS의 알고리즘은 우리의 욕망을 설계하고, 우리는 그 욕망에 ‘좋아요’로 반응한다.
칸트는 이것을 분명히 ‘타율’이라 부를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율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그 답은 여전히 동일하다 — 이성의 자각과 도덕법칙의 실천.
우리가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내 행동이 보편적 법칙이 되기를 원할 수 있는가?”
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간만이 자율적 존재다.
AI 시대에 ‘자율성’은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자율주행차, 자율무기, 자율적 의사결정 시스템. 그러나 이 ‘자율’은 칸트가 말한 자율이 아니다.
그것은 프로그래밍된 타율이다. AI는 의무를 느끼지 않으며, 도덕법칙을 ‘존경’하지 않는다.
진정한 자율은 이성적 성찰과 도덕적 존중의 능력을 전제한다.
따라서 인간만이 도덕적 행위의 주체일 수 있다.
AI 윤리가 인간의 윤리를 대신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계는 정언명령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존중’할 수는 없다.
칸트의 자율성은 인간의 내면적 존엄과 이성적 판단의 능력을 전제한다.
결국,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도덕적 책임의 주체는 인간이다.
21세기의 인간은 자유를 누리면서도 그 자유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자유는 풍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욕망의 무한 경쟁을 낳았다.
칸트는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너는 네 욕망의 주인인가, 아니면 그것의 노예인가?”
그의 선의 철학은 오늘날 윤리적 선택의 방향을 제시한다.
선이란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이성이 욕망을 이긴 순간의 결단이다.
따라서 도덕이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 속에서 구현되는 실천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때, 그것이 이익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옳기 때문’에 행해진다면 — 그 순간 인간은 자유롭다.
결국, 칸트의 윤리학은 인간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유는 네 안에 있다. 그러나 그 자유는 법을 세우는 순간만 존재한다.”
도덕은 억압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가장 높은 형태의 자유다.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칸트의 도덕철학은 고전이 아니라, 경고이자 희망이다.
그는 인간이 완벽하지 않다고 인정했지만, 동시에 인간 안에 무한한 도덕적 가능성이 있음을 믿었다.
우리는 여전히 흔들린다. 그러나 그 흔들림 속에서 “이성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것이 바로 인간이 도덕적 존재로 존재한다는 증거다.
의무는 구속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자유의 증거다.
욕망을 넘어 이성으로, 타율을 넘어 자율로 —
그 길 위에서만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