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은 언제나 먼 곳에서 시작된다. 사막의 긴장, 해협을 가르는 군함, 외교적 설전은 서울의 일상과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켜는 전등과 움직이는 자동차, 공장을 가동하는 기계는 모두 그 먼 바다를 지나온 에너지에 기대고 있다. 중동의 긴장은 뉴스 속 장면이 아니라 한국 산업을 흐르는 보이지 않는 혈관의 압력 변화다.

한국은 에너지 자원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다. 특히 원유와 액화천연가스의 상당량이 중동에서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통로로 꼽히는 호르무즈 해협은 한국 경제의 숨은 관문이다. 이 해협이 불안해질 때마다 국제 유가는 요동치고, 원가 상승은 곧바로 제조업과 물가에 반영된다.
문제는 단순히 기름값의 상승이 아니다. 글로벌 공급망이 정교하게 얽힌 시대에 에너지 가격의 변동은 반도체, 자동차, 철강, 화학 산업 전반에 파급된다. 생산 비용이 오르면 수출 가격 경쟁력이 흔들리고, 이는 곧 무역수지와 환율에 영향을 미친다. 한 지점의 충격이 여러 산업을 연쇄적으로 흔드는 구조다.
더 큰 위험은 심리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되면 금융시장은 안전자산으로 쏠리고, 원화 가치는 압박을 받는다. 기업은 투자 계획을 늦추고, 소비는 위축된다. 에너지 안보는 곧 경제 심리의 안정과 직결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이 실물 경제의 속도를 늦춘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인가. 첫째는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와 전략 비축 확대다. 둘째는 재생에너지와 수소 등 대체 에너지 전환을 가속화하는 일이다. 셋째는 공급망의 재편이다. 특정 지역에 집중된 원자재와 부품 조달 구조를 분산해야 한다. 단기 대응을 넘어 구조적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중동의 긴장은 언젠가 완화될 수 있다. 그러나 에너지 의존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연결된 세계에서 번영을 누려왔지만, 그 연결은 동시에 취약성의 통로이기도 하다.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먼 바다의 파도에 휘둘리는 경제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혈관을 단단히 설계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 이후의 대응이 아니라 위기 이전의 설계다. 에너지 안보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중동의 긴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번영을 지키려면, 보이지 않는 혈관부터 점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