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은 평양의 위치를 알려주는 좌표; 반드시 밝혀야! 그_3

한사군을 전하는 사기와 한서; 그 내용의 모호성

후한서와 삼국지 동이전이 밝혀주는 동이국가 위치와 낙랑군

잠정 결론은 하북성 석가장 북쪽 新樂(신락)

 

낙랑군은 평양의 위치를 알려주는 좌표; 반드시 밝혀야! 그_3

 

 

한사군을 전하는 사기와 한서; 그 내용의 모호성

 

한사군의 존재는 그 자체가 매우 모호하다

조선을 멸망시키고(BCE108한이 사군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은 

당대에 생존하며 기록한 사마천의 사기와

백 년이 조금 지난 후한 시기에 기록된 한서가 절대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그 기록의 신뢰성이 확실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당대의 사서 자체가 오늘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실물이 거의 없어 

후대의 첨삭이 의심스럽고

있더라도 그 시대를 정확하게 반영한 지식이나 정보가 담겨 있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진 태강 2(281)에 도굴한 묘에 남았다 발견된 죽간에 보존된 

죽서기년이라는 문서는 상서나 사기가 전하는 

요, 순, 우임금의 이상적인 선양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모두 전임자들을 무력이나 음모로 축출하고 임금의 지위에 올랐다고 전한다.

 

궁형을 경험한 사마천이 한 무제의 위압을 의식하지 않고 사기를 편찬했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따라서 사기의 기록을 비판적 시각으로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기에 대한 의문

 

본기에는 조선을 정벌하였다’ 뿐이고조선열전에 ‘사군을 설치하였다’며 군명은 없다.

한이 파견한 장수를 거의 주살하였다면 한이 진 전쟁인데이긴 조선이 항복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미 BCE 238년에 폐문하고 북부여가 일어났는데

왜 ‘조선’이라 기록했을까? 몰랐어도 문제알았어도 문제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서 찬탈 또는 정벌이라는 판단이 없다.

조선열전 두 번째 문장 중 진번과 조선을 공략과 같이 진번과 조선을 등가로 두 번 기록하였는바

이 조선이 나라인지 하나의 현이나 군인지 불분명하다.

4군을 설치하였다면서 어떻게 5명을 候()로 삼는가? (5후라면 5군이어야 한다.)

 

 

한서에 대한 의문

 

무제 본기에는 사군의 명칭이 있으나지리지에 낙랑과 현토 2군 기록되어 있다.

권27 중지하 오행지7 중지하 뒷부분에 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여 3군을 열었다고 하였다.

무제 본기에조선을 정벌하기 이미 20년 전(BCE 128

예군 남려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명을 이끌고 요동에 귀속

무제는 창해군을 만들었다몇년도 못 되어 없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침략한 조선의 존재가 모호하다.

7에는 시원 4(BCE 82)에 진번군을 없앴다.’고 하였다

(‘진번’ 또한 매우 복잡한 주제인지라 별도로 다룰 예정이다.)

후한서 동이열전 항목에는 임둔과 진번을 낙랑과 현토에 합병

현토는 다시 구리로 옮겼으며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예속시켰다가

너무 넓어 동쪽 7현을 떼어 낙랑군에 속한 동부도위를 두었다고 하였다.

 

※ 위 사기의 무제 조선정벌과 한서 식화지 ‘창해군 사건’의 해석

권24 식화지 하; “彭吳穿穢貊朝鮮 置滄海郡 則燕齊之間 靡然發動”

(팽오가 예맥·조선을 개척하여 창해군을 설치하자, 연·제 사이가 크게 동요하였다.)

무제의 경제정책을 나무라는 내용 가운데 하나이고 

穿()은 흔히 개척 또는 개통으로 번역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을 한무제의 소위 위만조선 정벌과 연계시키면 뜻이 완연히 달라진다

예맥조선의 관리를 ’매수‘하여 멸망시키고 창해군을 두었더니 

연제 사이의 백성들에게 소요가 일어났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창해군이 연과 제 사이에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삼국사의 낙랑 기사 모음

신라 혁거세 30년(BCE 28년) 낙랑인이 군사를 이끌고 침범.

맥제 온조왕 8년(BCE 11년) 낙랑태수가 병산책을 허물라고 요구. 불응하여 불화

백제 온조왕 13년(BCE 6년)에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한수 남쪽으로 천도를 계획하여 14년 정월에 천도한다.

백제 온조왕 17년(BCE 2년) 낙랑 내침하여 위례성을 불지름

백제 온조왕 18년(BCE 1년) 10월 말갈이 엄습, 11월 낙랑의 우두산성을 공격, 대설로 회군

신라 남해차차웅 원년(CE 4년) 11년(BCE 14년)에 낙랑군사가 (신라 수도) 금성을 침범

신라 유리왕 13년(CE 36년) 낙랑이 북변을 침범

고구리 대무신왕 20년(CE 37년) 대무신왕이 낙랑을 쳐서 없앴다.

신라 유리왕 14년 (CE 37년) 위 사건으로 낙랑인 5천 명이 와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다.

고구리 대무신왕 27년(CE 44년) 후한 광무제가 낙랑을 쳐 살수 이남이 한의 땅이 되다.

고구리 민중왕 4년(CE 47년) 잠우락부 대승이 만여 가구를 끌고 낙랑에 투항

고구리 태조대왕 94년(CE 146년) 요동 서안평을 쳐서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 처자 탈취

신라 기림왕 3년(CE 300년) 낙랑과 대방이 귀복

고구리 미천왕 14년(CE 313년) 낙랑군을 쳐서 남녀 2천 명을 사로잡았다.

 

 

기타 참고 문헌

후한 때 王充의 論衡에漢을 周나라와 비교하는 논란 중에 타자를 언급하며 등장한다.

巴, 蜀, 越嶲, 鬱林, 日南, 遼東, 樂浪, 周時被髮椎髻, 今戴皮弁;周時重譯, 今吟詩書.

파, 촉, 월수, 울림, 일남, 요동, 낙랑은 주나라 때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송곳 모양 상투(椎髻)를 틀었으나, 지금은 가죽 모자(皮弁)를 쓰고 있다. 

주나라 때는 여러 번 통역을 거쳐야 했으나, 지금은 시경(詩)과 서경(書)을 읊을 줄 안다.

 

역시 후한 때 편찬된 潛夫論에 한나라의 동서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東至樂浪,西至燉煌

동쪽으로는 낙랑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돈황에 이르렀다.

東開樂浪, 西置燉煌, 南踰交阯, 北築朔方

동쪽으로는 낙랑을 열고, 서쪽으로는 돈황을 설치했으며, 

남쪽으로는 교지를 넘고, 북쪽으로는 삭방을 쌓았다.

 

낙랑군의 희미한 그림자

 

위의 사서 기록들 가운데 내용이 매우 불분명한 것도 있고인과관계가 드러나지 않은 것도 있다따라서 다른 주제의 기사와 겹쳐 보아야 낙랑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그럼에도 위 예문을 종합하고 보면다음과 같은 윤곽이 떠오른다.

 

1) 낙랑은 요동과 함께 한을 비롯한 소위 중원국가의 동쪽또는 북동쪽 한계이다.

2) 기록상으로 전한 한무제 때 처음 낙랑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3) 백제 동쪽에 있었음으로 추정컨대 이때 낙랑은 매우 동쪽이었다.

4) 예군 남려가 이끌고 간 인구가 28만은 오늘날도 큰 인구인만큼 창해군은 엄청나게 큰 군일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도 하북성 동부의 창주와 창현해라는 지명

낙릉이란 지명은 집단무의식 속에 남아 유지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5) 태조대왕 94년의 사건 등으로 대방과 낙랑은 매우 근접하여 존재함이 확실하다

나아가 신라와 당이 백제와 고구리를 멸망시키고 영토 차지를 두고 

7년 전쟁할 때 당은 석문 들에신라는 대방 들에 진을 친 사실과 

태항산맥을 넘나드는 태원과 석가장 길목이라는 

지리적 요충지를 감안하여 하북성의 매우 서쪽임을 알 수 있다.

6) 위의 3과 및 5의 조건으로 후한 초기까지는 하북성 동쪽에 위치하였으나

광무제 이후는 하북성 서쪽으로 고정되는 듯하다.

 

 

후한서와 삼국지 동이전이 밝혀주는 동이국가 위치와 낙랑군

 

우리 국보 삼국사에서 거의 파악할 수 없는 삼국과 함께 우리 조상국가의 위치를

타자의 기록이라 내용은 풍부하지 못하여도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전으로 확연하게 알 수 있음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지면을 아끼고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두 문헌의 요점만을 보자.

 

부여국은 현토의 북쪽 천리 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리와,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읍루는 옛 숙신의 [지역에 있는] 나라이다.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여 리 밖에 있는데, 

동쪽은 대해에 닿고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고구리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여 있다.

동옥저는 고구리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큰 바다에 연접하였으며, 

북쪽은 읍루·부여,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그 지형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면적은] 사방 천리의 절반쯤 된다.

북쪽으로는 고구리·옥저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해 있고, 

동쪽은 대해에 닿으며, 서쪽은 낙랑에 이른다.

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남쪽은 왜와 접하여 있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는 한의 동남쪽 大海(대해; 오늘날 바다가 아님) 가운데 있고, 

[이들은] 산이 많은 섬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데, 

무릇 100여 나라이다. (왜인은 대방 동남 대해 가운데에 있다)

 

이 내용을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이 표의 틀 속에 지명을 넣으면 다음 표와 같이 그 위치가 더욱 선명해진다.

 

 

잠정 결론은 하북성 석가장 북쪽 新樂(신락)

 

낙랑은 자칭 화하족 또는 한족과 그들이 동이국가 또는 

번국이라 부르는 나라의 경계에 존재하며갈등의 현장이었다

따라서 그 위치에 대한 연구는 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만의 관심꺼리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위치는 늘 안개 속에서 희미할 뿐이었다

다만 삼국사의 라당전쟁 기록으로 석문과 대방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도록 결정적 단서는 제공하였다.

 

이제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 밖에서 조감적으로 보이는 위치 기록이 가시화되었다

낙랑군의 위치가 지리적 요건으로 본다면 

하북성 중부 석가장보다 북쪽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대방군을 그 남쪽으로 추정할 수 있음은 

의 위치를 지정하며 늘 대방의 동남이라고 지적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정확한 영역을 단정할 수 없더라도

군국주의 시대 일본인 학자들의 ‘봉니 출토’라는 속임수에 걸려 

평양을 낙랑군이라 비정할 수 없음은 확실해졌다.

더구나 속이는 자보다 속는 자가 더 나쁘다고 한다

봉니란 받는 곳에서 발견되어야지, 보내는 곳에서 발견될 수 없는 성격의 유물이다

낙랑군태수의 봉니는 낙랑군에서 보내는 서찰이나 발송품에 붙였다

받는 곳에서 뜯어야 하므로 낙랑군과 제일 오가는 것이 많았을 

한의 수도 장안에서 제일 많이 발견되어야 하는 성격의 유물이다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논거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

이 상식적 논리만으로도 논리적일 수 없는 낙랑군 평양설은 더 들리지 않게 되기 바란다.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옥저에서 만나는 호동왕자와 낙랑왕 최리의 삼국사 기록으로 

낙랑국 영역은 고구리 동쪽 옥저의 남쪽

만주 남쪽과 오늘날의 한국 땅임이므로 낙랑군과 연계될 수 없다.

 

평안남도 덕흥리 무덤의 묵서와 각종 지리지로 

낙랑군이 북경 인근에 존재하는 유주에 속한다는 사실을 단정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태어난 곳이나 활동지역에 묻힌다는 상식으로 판단한다면

북경의 대흥구 황촌진에서 2014년 발굴된 한현도 무덤의 명기는 

낙랑군조선현이 북경에서 멀지 않은 곳임을 넌지시 알려준다.

 

이 글의 앞에서 인용한 삼국사와 후한서 및 삼국지 동이전 기록을 종합하면서

 {‘예군 남려와 28만 명’ ― ‘창해군 설치’ ― ‘예의 서쪽’} 묶음으로 낙랑군의 하북성 서쪽임을 확정한다.

고대로부터 태원에서 하북성으로 넘어가는 

‘태항산맥의 길목 정형관’과 대방군 및 낙랑군의 조합은 석가장의 멀지 않은 북쪽을 가리킨다

석가장 조금 북쪽의 新樂(신락)은 석가장과 북경 사이에 위치하며 

대방군의 북쪽에 해당하므로, 낙랑군으로 비정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지이다.

 

이것으로 잠정결론을 삼고다른 자료를 수집하여 더 확정적일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한다.

 

 

 

작성 2026.02.27 15:45 수정 2026.02.27 15:56

RSS피드 기사제공처 : 우리역사와 땅 / 등록기자: 박완서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해당기사의 문의는 기사제공처에게 문의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