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소포스의 딸 아이기나는 제우스에게 유인당하였다. 아소포스는 딸이 없어진 것을 알고 놀라서 시지프스에게 호소했다. 이 유인사건을 알고 있던 시지프스는 코린트 성에 물을 공급받는다는 조건으로 이 사실을 아소포스에게 말해준다. 하늘의 진노인 벼락보다 물의 은총을 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지옥에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작가로 알려진 서력. 기원전 10세기경의 그리스 서사시인 호머는 또한 시지프스가 사신을 쇠사슬에 얽어맸다는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저승의 신 풀푸토는 제 세상인 저승이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고요해진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전쟁의 신을 급히 파견, 사신을 시지프스의 손에서 해방시켰다. 게다가 임종이 가까운 때에 시지프스는 처의 사랑을 시험해 보려고 했다. 자기 시체를 땅에 묻지 말고 광장 한복판에 팽개쳐 두라고 그는 처에게 일렀다. 시지프스는 지옥에 떨어진다. 인간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먼 처의 복종에 화가 난 시지프스는 처를 골려 주기 위해 다시 한번 지상으로 돌아올 허가를 풀푸토에게서 얻는다.
그러나 재차 이 세상 풍경을 보고 햇볕에 탄 돌과 바다의 맛을 보자 그는 저승의 어둠 속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진다. 소환도 경고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을 그는 하구의 만경과 찬란한 바다, 대지의 미소를 즐기며 살아간다. 신들은 그를 체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우스의 아들로 제신의 사자인 멜쿠르스가 와서 이 대담한 사나이 시지프스의 목덜미를 잡고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갔다. 지옥에는 벌써 그를 위한 바위가 준비되어 있었다. 지옥에서의 시지프스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본래 신화란 인간의 상상력이 그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리라. 우리들에게는 다만 시지프스가 저 거대한 돌을 밀어 올려 굴리는 그의 혼신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긴장한 그의 얼굴, 돌에 밀착된 그의 뺨, 진흙에 뒤덮인 바윗덩어리를 지탱하는 그의 어깨, 돌과 한 덩어리가 된 몸을 바치고 선 그의 두 다리, 흙투성이 된 그의 두 손으로 굳게 움켜잡아 쥔 너무도 인간적인 정확성과 집착력이 우리에게 여실히 보일 따름이다.
도달할 하늘이 없는 공간과 끝나는 날이 없는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이 길고 한없는 노력 끝에 일견 목적이 달성된다. 그러자 어느새 돌은 순식간에 하계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시지프스는 보고 있다. 하계로부터 또 다시 기백 번, 기천 번째 그 돌을 그는 산꼭대기로 올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다시 들로 내려간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 주말이면 월말이면 또 연말이면 반복되는) 이 하산(下山), 이 휴식,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시지프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기진역진하여 돌 가까이 가는 그의 얼굴은 돌 그 자체다. 무거우나 틀림없는 발걸음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고뇌의 발걸음으로 그는 산을 내려간다. 이를테면 호흡작용처럼 그의 불행이 반복되는 이 순간, 이것은 의식을 되찾는 순간이다.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거처로 내려가는 이때 시지프스는 순간마다 그의 운명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운명의 바위보다 굳세다.
‘시지프스의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그 주인공의 의식이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성공한다는 희망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를 떠밀고 있다면 그는 어떠한 어려움도 감수,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의 노동자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또는 감성적이든 매일 같은 일에 종사하고 그의 운명은 시지프스의 것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가 비참해지는 것은 그의 의식이 눈을 뜨는 희귀한 순간뿐이다.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면서도 반항하는 시지프스는 자기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다. 산을 내려오면서 줄곧 그가 생각하는 것은 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의식하는 그의 인식이 그의 승리를 완벽하게 한다. 모멸함으로써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날마다 시지프스의 하산은 고통스러운 자학의 행로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기쁨에 찬 자존자대(自存自大) 곧 자애의 행로일 수가 있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시지프스가 그 바위로 돌아 온 장면을 상상해 보자. 고통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다. 이 대지의 아름다운 광경이 너무나 기억에 생생할 때, 행복을 갈망하는 부르짖음이 너무나 격렬할 때, 너무도 비통한 비애가 인간의 가슴을 채운다. 이것이 바위의 승리요, 바위 그 자체다.
끝없는 고통과 한없는 비애란 인간으로서 감당 못할 일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겟세마네의 밤이다. 그러나 사람을 짓눌러버리는 사실은 이 사실을 인식할 때 소멸한다. 에디푸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에디푸스는 그가 그의 운명을 알게 되는 때부터 그의 비극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눈이 멀고 절망한 에디푸스는 이 세상에 자기를 붙들어 매는 유일한 끈은 생기 넘치는 젊은 딸의 팔이란 것을 그는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이때 경이로운 말이 들린다.
이와 같이 많은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령(老齡)과
내 영혼의 위대함은
나로 하여금 판단케 한다.
모든 것은 다 좋다고.
‘모든 것은 다 좋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렇게 오이디푸스는 말한다. 이 말은 숭고하다. 이 말은 인간의 잔인하고 무정 무한한 우주 속에 쩡쩡 울린다. 이 말은 모든 것이 과거에 다한 일 없고, 현재도 다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다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준다. 이 말은 온갖 불행과 고통을 갖고 이 세계에 들어 온 신들을 이 세계로부터 쫓아낸다. 이 말은 인간의 운명을 인간이 풀어야 할, 인간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에 시지프스의 남모를 기쁨이 있다. 시지프스의 운명은 시지프스의 것이다. 시지프스의 바위는 시지프스의 것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