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면 안부를 묻게 된다. "잘 지내지?" 돌아오는 답은 거의 비슷하다. "뭐, 그냥 그래." 옷차림은 단정하고 말투는 차분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이렇게 덧붙였다. "그냥 좀 가라앉아. 큰일은 아니고." 큰일이 아니라는 그 말이 가끔은 가장 큰일처럼 들린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7년 보고에서 전 세계적으로 3억 명 이상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추정했다. 한국에서는 2024년 우울증 진료 환자가 약 110만 6천 명에 이르러 역대 최다를 기록했으며, 2020년에 비해 약 33퍼센트 늘었다.
특히 10세 미만은 5년 새 2배 이상, 30대는 약 70퍼센트 증가하는 등 젊은 연령층에서의 증가가 두드러진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로,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건강 문제의 유병률과 치료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것이 지금 한국 사회의 마음이 서 있는 자리다.
그런데 이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회사 일을 잘 처리하고, 운동도 거르지 않고, 주말이면 약속을 나간다. 겉으로는 어디 하나 흔들리는 데가 없다. 다만 점심 메뉴 하나 고르는 것도 버겁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점 소모적으로 느껴지며, 예전에 즐거웠던 일이 더는 즐겁지 않다. 학계는 이를 '고기능 우울증', '가면 우울증', '미소 우울증'이라 부른다. 공통점은 하나다. 바깥은 멀쩡한데 안쪽이 말썽이다.
25년간 약 20만 명을 진료한 일본의 정신과 전문의 다이라 고겐은 여기에 새 이름을 붙였다. '반(半)우울'. 그는 저서 『반우울』에서 이를 우울감과 우울증 사이에 놓인 심리적 중간 지대로 정의한다. 분명히 가라앉아 있는데 진단 기준에는 못 미치고, 병명이 없으니 본인도 주변도 가볍게 넘긴다. 그 사이 마음은 소리 없이 금이 간다. 그가 가장 위험하게 보는 태도는 분명하다. '아직은 괜찮다'며 자신을 계속 다독이는 일.
여기에 유독 잘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 참을성이 좋은 사람. 좋은 직장인이고 좋은 부모이며 좋은 자식인 사람. 다이라 고겐은 이들의 공통점을 한 줄로 정리한다. '나는 약해지면 안 된다'는 강박. 미덕이라 불리던 자질이 정작 자신을 가장 먼저 소진시킨다.
나도 그랬다. 몇 년 전 번아웃과 마음의 지진, 우울증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야 했다. 완벽주의에 갇혀 스스로를 끊임없이 몰아붙이며 살았고, 그 방식이 결국 나를 무너뜨렸다. 무너지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외면해 온 신호가 한참 전부터 와 있었다는 사실을.
병원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종종 본다. 늘 활발하던 강아지가 어느 날부터 산책 가자는 말에도 시큰둥하다. 좋아하던 간식에도 시들하다. 보호자는 한참 뒤에야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두어 달 전부터 좀 그랬던 것 같아요." 동물에게도, 사람에게도, 신호는 늘 미리 와 있다. 다만 우리가 늦게 알아챌 뿐이다.
문제는 개인만이 아니다. 누군가 "요즘 좀 힘들다"고 운을 떼면 우리는 너무 쉽게 "힘내"로 받는다. 다이라 고겐의 처방은 단순하다. "힘내"라는 공허한 말 대신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정말 부족했던 건 위로의 기술이 아니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 웃고 있는 사람도 속으론 조용히 울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모두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자. 우리 자신에게도. '괜찮은 척'이 미덕이 되는 사회는 결국 가장 성실한 사람들부터 무너뜨린다.
다시 지인의 그 한 마디가 떠오른다. "큰일은 아니고." 그 말이 정말 큰일이 아니면 좋겠다. 만약 그게 아니라 이미 마음에 균열이 벌어진 상태라면, 늦지 않게 그 신호를 알아챘으면 한다.
당신의 마음은 요즘 어떠한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 하고 있지는 않은가.
[박근필]
그로쓰 퍼실리테이터
읽고 쓰고 말하는 삶으로 당신의 성장을 돕습니다
박근필성장연구소장, 수의사,
칼럼니스트, 커리어 스토리텔러
저서; <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
독저팅, 필북, 필레터, 필라이프 코칭 운영
부산 시청 특강 외 다수 출강
이메일 : tothemoon_par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