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식 칼럼] 문학과 종교를 통섭한 시 한 편

김관식

오늘날 인문과학이 푸대접받고 있다. 모든 학문의 기초이며, 사람이 살아가는데,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와 실존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는 인문학이 경제적인 부와 지위를 얻는데 필요한 과학을 바탕으로 한 응용과학을 선호하는 바람에 인문과학이 뒷전으로 물러났다. 

 

인문학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학문은 문학, 사학, 철학이다. 문학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갈고 다듬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들의 삶과 정서를 문학작품으로 만들어 읽고 공감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는 학문이고, 역사학은 과거에 살아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옳고 그름을 생각해 봄으로써 판단력을 길러주고 앞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며, 철학은 사람의 사유 세계를 확장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자아를 성찰하게 한다. 

 

인간이 태어나서 동시대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도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깨우쳐주는 인문과학을 소홀히 함으로써 공동체의 기초 질서가 무너지고 인간의 실존 의미와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극도의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인간성의 상실 등 공동체 구성원이 좋은 환경에서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아가야 함에도 서로 불신의 벽을 쌓으며, 경계하며 살아가는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오늘날 인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자기 존재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문학과 예술, 종교도 모두 병들어가고 있다. 인문과학이 지향하는 본질을 외면하고 가면을 쓰고 인문학의 주변을 맴돌며 스스로가 고독한 섬이 되어가고 있다.

 

어느 종교나 종교의 교리를 담은 신앙서가 있기 마련이다. 교리를 글로 문학의 영역으로 표현된다. 글을 쓰는 문학적 행위나 각종 예술 활동을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존재의 의의를 찾으려 하는 문학인이나 예술인도 모두 문학과 예술의 본질을 추구하며,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 자기 정체성과 자아실현을 하려는 진정한 문인, 예술인은 없고, 문학과 예술을 자신의 존재를 홍보하거나 물질적인 이득을 노리는 등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도 묵묵히 오직 작품창작에만 몰두한 소설가 한강이 최근 우리나라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문·사·철의 정신으로 살아왔다. 우리나라 문학, 예술계도 이처럼 진실한 문학과 예술에 자신의 혼을 불사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나, 워낙 혼탁해진 문학과 예술계에 이들은 묻혀 살아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묵묵히 진정한 종교인으로 모범을 보이며 살다 간 종교 지도자가 사후에 존경받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살아있으면서 자신을 알리려고 발버둥 치는 문학인이나 예술인은 그리 오래 대중의 사랑을 받기 어렵다. 그들이 정작 숨겨야 할 천박하고 속물적이며 위선적인 껍데기를 스스로가 남겨 놓은 바람에 명작을 남겨놓고서도 후세에 나쁜 평가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까맣게 망각한 것이다.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그의 저서 『성과 속』을 통해 성스러운 것과 속세라는 대립한 개념으로 종교를 새로운 지평에서 종교를 해석하면서 “성(聖)과 속(俗)의 구분을 가장 원초적인 종교적 개념으로 초기부터 ‘성’이라는 말은 일종의 종교적 행위를 하는 장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속’이라는 말도 장소를 나타내는 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성과 속은 서로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쪽이 고귀하면 다른 쪽은 열등하고 한쪽이 숭배, 사랑, 감사의 성격을 띠면 다른 쪽은 혐오, 공포, 위협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쪽은 적극적인 힘, 건강, 사회적인 우월, 전쟁에서의 용기, 노동에서의 큰 힘을 말한다면, 다른 쪽은 죽음과 파괴적인 힘, 병과 재해, 전염병, 범죄 등을 일으킨다. (엘리아데, 『성과 속』, 22쪽)

 

참된 문학의 길은 성스러운 행위이고, 문학을 도구 삼아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나 밥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그의 문학 하는 방법은 부질없는 속된 활동이 되어 만인의 존경을 받지 못함은 당연한 귀결점일 것이다. 이런 속물적인 문인이나 예술인이 만인이 공감하고 사랑하는 명작을 남기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뀌어가는 격일 것이다. 살아있을 때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간에 묵묵히 자신의 문학과 예술세계를 위해 온갖 노력을 한 사람의 창작품은 언젠가는 알려지고 만인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속의 영역에서 문학을 하다가 성의 영역으로 옮겨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은 언젠가 성스러운 문학작품을 남기게 되지만, 오늘의 한국 문인들의 풍속도로 보면, 속의 영역에 평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욕을 부리다가 쓸쓸하게 문학 인생을 종결할 문인들이 대부분일 것으로 예견된다.

 

살아있는 문인이 자신의 존재와 작품을 스스로 영구히 남기려고 문학비를 세운다거나 문학관을 짓고 스스로가 높아지려는 어리석은 짓은 결국 속의 영역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되는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문학의 가치를 존중하고 문학의 길을 걷는 창문인 살아있는 동안 문학과 종교의 합일점을 찾아 겸손하게 자신은 물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진실한 문인이 많아져야 우리나라의 문학이 바로 설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학이 앞으로 진실한 문학인들이 자리를 잡고 정당한 대접을 받게 된다는 사필귀정의 신호탄을 소설가 한강이 보여주었다. 

 

여기 시인이 시를 쓰면서 문학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서 사색하고 갈등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허정진의 시집 『살다가 가끔 갸우뚱, 한다』에 실린 시 한 편을 소개한다.

 

 혀(言)를 제단에 바치면 시(詩)가 되고

 혀(言)를 나에게 사용하면 말(語)이라는데

 

 사랑 아닌 사랑을 찾고

 지문처럼 새겨진 퀭한 상처만 끌어안고

 나를 죽여 구원의 기쁨을 붙잡지도 못한 채

 칸델라 파란 불꽃처럼 틈마다 흔들리고 살면서

 

 시가 어디에 있나?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게 느껴야 하는 체험도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보는 영감도 없이

 들으려는 귀도 열지 않고

 읊으려는 입도 열지 않고 

 

 시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던 네루다의 푸념처럼!

 

 그리움이 성육되는 깊고 깊은 밤

 내 안의 말이 허물을 벗고

 잠들어 있던 영혼이 말씀으로 다시 태어나면

 침 바른 연필심 꾹꾹 눌러가며, 밀서처럼

 주님의 시(詩)를 눈물로 받아 적는다

 

 신(神)이 이미 만들어둔 것을

 나는 다만 돌을 깎았을 뿐이라는 미켈란젤로의 조각처럼

 -허정진의 「시인이 되다」 전문, 

 

“시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던 네루다의 푸념처럼” 이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 이런 자세는 우리 문인들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다. 이 시는 문학을 신앙처럼 붙들고 성의 영역을 지향하며 갈등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시인은 어떤 자세로 시를 써야 하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김관식]

시인

노산문학상 수상

백교문학상 대상 수상

김우종문학상 수상

황조근정 훈장

이메일 : ​kks41900@naver.com

 

작성 2026.04.13 10:40 수정 2026.04.1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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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