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관계에서 갈등은 숙명처럼 피할 수 없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집착이 어떻게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대중심리학은 흔히 끝까지 이야기해 풀어야 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갈등도 생명처럼 스스로 다할 운명을 지닌다. 억지로 개입하기보다는 그 생이 다하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더 현명할 때가 있는 것이다. 타이밍을 잘못 얹힌 대화는 오히려 상처를 더 깊게 후비는 데 일조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갈등은 시간 속에서 자연히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내면에 보이지 않는 탑처럼 쌓여가는 것일까.
철학은 이 질문에 오래된 답을 들려준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우리를 괴롭히는 건 사물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판단이다"라고 했다. 갈등은 외부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부여한 의미에서 자라난다. 그래서 내버려두기는 회피가 아니다. 과도한 판단을 멈추는 일이다. 스토아주의의 아파테이아(apatheia)는 초연함의 상태로 갈등의 자연수명을 존중하는 태도이다. 반대로 끝까지 이야기하자고 덤비는 집착은 오히려 그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도 비슷한 결을 가진다.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는 무상(無常)의 진리를 떠올려보자. 갈등 역시 머물지 않는다. 집착하면 열기를 키울 뿐이며 놓아두면 차츰 흩어진다. 달라이 라마는 분노를, 상대를 향해 던지려 쥔 뜨거운 숯이라고 표현했다. 끝없이 말을 이어가며 해결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그 숯을 더 오래 쥐는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업(業)의 개념을 통해 방치된 갈등이 다른 형태로 되돌아올 수 있음을 경고하기도 한다. 내버려둔다 해도 무의식적이어서는 곤란하다. 인식된 무위(無爲)가 진정한 해탈이다.
니체의 생각은 더 도발적이다. 그는 갈등을 피해야 할 것이 아닌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로 보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혼돈 속에서 별이 탄생하듯, 갈등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근원으로 보았다. 이 과정에서도 억지 개입을 경계했다. 갈등을 지나치게 조작하면 그것이 품은 에너지가 사라진다. 그대로 두어야만 혼돈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싹튼다. 이때의 내버려두기는 무의식적 억압이 아니다. 자각을 동반한 기다림이어야 한다. 깊은 물 아래에도 흐름이 있듯, 그 속에서도 의식은 잔잔히 숨 쉬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까. 한 지인의 사례가 있다. 그는 상사와 잦은 충돌로 꽤 힘들어했다. 화해를 위해 여러 번 대화를 시도했으나 감정이 앞서는 탓에 대화는 매번 상처를 더 깊게 쑤셨다. 결국 그는 어설픈 개입을 멈췄다. 상사의 태도에 매번 반응하는 대신 자기 일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몇 달 뒤에 상사의 태도는 뜻밖에도 누그러졌다. 갈등의 시간이 다하자 잠잠해졌다. 그가 유일하게 한 일은 매일 감정 일기를 써서 자신의 감정을 관찰한 거였다. 인식된 내버려두기가 갈등을 탑처럼 쌓이지 않게 한 방패가 된 것이다.
역사 속에서도 비슷한 통찰이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전쟁 중에 잦은 불화를 겪었다. 그는 격한 비판의 편지를 쓰곤 했다. 보내면 그의 기분은 나아질 수도 있으나 전쟁은 더 어려워질 것이므로 끝내 보내지 않았다. 편지는 분노를 식히는 도구로 쓰인 뒤 쓰레기통으로 갔다. 그 침묵은 그의 리더십을 단련시켰다. 갈등을 버텨내는 시간은 그에게 사유의 깊이와 작은 우울의 그림자를 남겼다. 그것은 지도자의 숙명이자 한 인간의 숨은 진실인지도 모른다.
갈등은 생명처럼 태어나고 그 나름의 사라짐을 지닌다. 그 과정에 성급히 개입하면 여명의 불빛을 꺼트릴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방치는 위험하다. 내면의 어둠이 탑처럼 쌓이지 않게 스스로 들여다보는 사유가 필요하다. 말보다 시간이 해결보다 관조가 더 깊은 이해로 이끌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는 사랑》의 제목이 역설로 일깨우듯, 견딜 수 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을 견뎌내는 힘이 갈등을 사랑으로 바꾸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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