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사회 평론가인 서울대학교 김누리 교수는 다산에게 깊이 빠져 밥을 먹으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오직 다산만을 생각한다고 했다. 김 교수는 여러 강연과 글에서 한국 사회와 교육, 지식인의 태도를 비판하거나 성찰하는 맥락에서 다산 정약용의 삶·사상에 대해 언급하며 “일상에서도 다산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나는 틈만 나면, 그리 멀지 않은 남양주 정약용이 나고 자란 여유당(與猶堂) 생가와 묘소, 기념관이 자리한 정약용유적지와 다산생태공원을 즐겨 찾는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생애를 반추할 때, 우리 마음이 가장 먼저 머무는 곳은 1801년 신유박해 직후의 시린 강진 유배길이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조 대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젊은 정치가가 하루아침에 대역죄인의 낙인이 찍힌 채 땅끝으로 내몰렸다. 그것은 단순한 좌천이 아니라, 존재의 근간이 송두리째 뿌리 뽑히는 가문의 멸문지화(滅門之禍)*였다.
가문의 비극은 참혹했다. 셋째 형 정약종은 천주교 전교회장으로 활동하다 장남 철상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훗날 기해박해 때 그의 부인과 남은 자녀들까지 모두 순교의 길을 걸었다.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자 다산의 매부였던 이승훈 역시 같은 해 참수당했다.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멀리 유배되어 생이별을 해야 했으니, 집안의 기둥 중 온전한 이는 유교 전통을 지키며 문중을 보살핀 큰형 정약현 뿐이었다.
절망의 끝에서 다산이 마주한 강진의 민심은 칼바람보다 매서웠다. 대역죄인이라는 서슬 퍼런 딱지에 누구 하나 말 붙이는 이 없던 그때, 동문 밖 주막집의 한 노파가 그에게 허름한 골방 한 칸을 내어주었다.
다산은 그 비좁고 초라한 골방에 ‘네 가지를 마땅히 바로 세우는 방’이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생각은 맑게 하되 더욱 맑게 한다.
용모는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한다.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한다.
행동은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한다.
겨울이면 칼바람이 문틈을 파고들고, 여름이면 모기와 벼룩이 밤잠을 앗아가는 열악한 공간이었지만, 다산은 그곳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며 조선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할 학문의 기틀을 다졌다. 주막집 노파와 그녀의 딸이 보여준 정성 어린 보살핌은 다산이 절망의 늪에서 다시 붓을 잡게 한 생명수와도 같았다. 훗날 조선의 국가 체제를 새롭게 설계한 《경세유표》의 거대한 구상이 이 작고 어두운 방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다산의 삶은 한마디로 정의하기엔 너무나 광활하다. 초등 교과서 속의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라는 문구는 그의 방대한 세계를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는 2200여 수의 시를 남긴 탁월한 시인이었으며, 거중기와 배다리를 설계한 공학자였고, 전염병을 연구한 의학자이자 백성의 삶을 긍휼히 여긴 행정가였다. 28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그 천재성은 유배라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오히려 ‘민본(民本)’이라는 단단한 열매를 맺었다.
그의 진가는 18년 유배 생활 동안 쏟아낸 500여 권의 저술에서 드러난다.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해양 생태 보고서인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바다와 대화하는 동안, 다산은 육지의 끝에서 조선의 모든 학문을 재해석했다. 57세에 고향으로 돌아오기 직전 완성한 《목민심서》는 오늘날까지 공직자의 필독서로 꼽힌다. 누군가 이를 단순히 필사하는 데만 10년이 걸린다는 이 압도적인 학업 성취는, 실의에 빠져 폐인이 되기 쉬운 유배객의 시간을 초인적인 의지로 치환한 결과였다.
그 치열함의 흔적은 처절하도록 아름답다. 저술에 몰두하느라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는 ‘과골삼천(踝骨三穿)’의 일화는 유명하다. 이빨이 빠지고 머리카락이 가늘어지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나중에는 앉아 있을 수조차 없어 시렁에 줄을 매고 서서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러면서도 아내에게는 애틋한 그리움을, 아들들에게는 선비로서의 당당함을, 제자들에게는 따뜻한 가르침을 편지에 담아 끊임없이 보냈다. 그의 학문이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이유는 그 속에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이 스며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산의 학문 세계는 현대적 해석으로도 가늠하기 힘든 넓고 깊은 초인적 생애 그 자체다. 학계에서는 그를 의학, 문학, 지리학, 정치학, 과학, 천문학, 행정학, 경학, 법학, 토목공학, 역사학 등 전 분야를 망라한 전무후무한 ‘지식경영자’라 명명한다. 어느 교수가 다산에게 빠져 늘 다산을 생각할만하다. 그의 사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이 머물던 공간, 다산초당을 동경하며 그가 남긴 일화 하나하나를 차근히 풀어내 보고 싶다. 틈틈이 꽃과 나무를 가꾸고, 연못의 물고기와 초가 위 박넝쿨을 바라보며 은은한 차 향(茶香)으로 고독을 달랬을 스승. 시대를 앞서갔던 그 거인의 발자취를 감히 흠모하는 마음으로 따라가 본다. 다산이 뚫린 복사뼈로 견뎌낸 그 시간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다시금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있다.
[문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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